“어느 사찰에서 해제비를 750만원씩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참선하는데 왜 노동의 대가처럼 받아야 하느냐. 그 돈이 누구의 돈이냐. 비구니 스님들은 50만원 넘는 곳이 드물고, 비구들도 100만원도 안 받는 곳이 있다지만, 문제는 해마다 기록이 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방의 치부가 될 듯한 얘기가 스님들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지난 8월14~18일 4박5일간 지리산 실상사 일원에서 ‘움직이는 선원’이라는 독특한 야단법석에서였다. 그 야단법석은 이론과 실천, 수행과 생활이 통일되고, 현대문명의 문제에 응답하는 불교관을 정립하기 위해 고심해온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등을 씨앗으로 태동한 ‘움직이는 선’이 주관했다. 시대와 상관없이 선방에만 앉아 있는 기존의 선과는 달리 시대와 뭇 생명의 절절한 바람에 응답하기 위해 대안을 찾기 위한 자리였다.
동참자의 신청을 받아 함께하는 이 법석에선 조계종 전 교육원장 무비 스님과 전국선원수좌 대표인 선승 혜국 스님, 향봉 스님, 도법 스님 등이 60~90분 강의하고, 이에 대해 두 시간 이상 대중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다.
향봉 스님의 지적은 선승들이 겨울 동안거와 여름 하안거 때 90일씩 참선 수행을 하고 나서 안거가 끝날 때 사찰 쪽으로부터 해제비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스님은 “안거를 하는 선원 중 10%에도 못 미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체 불교계의 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반박에도 불구하고 해제비 문제 제기는 불교계 안팎에서 상당한 공감을 샀다. 그날 현장에서 토론을 지켜본 한 스님은 “많이 주는 곳의 해제비를 계산하면, 시간당 7만원 이상이 돼 출가한 스님이 참선 한 시간 하면 간단히 현금 7만원 번다는 말”이라며 “학생이 공부하며 되레 공부에 대한 수고비를 받는다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태어나서 부처님 만나기 어렵고, 정법 만나기 어렵고,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얻기가 힘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 수행자들은 공부할 기회 한번 얻기 위해,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기 위해 그야말로 30년 지게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허 스님의 맏상좌로 이름 없이 자비보살로 살다갔던 수월 스님(1855~1928)은 충남 서산 천장암에서 수행할 기회 한번 얻지 못하고 수십 년간 나무만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 어느 날 천장암 주지를 맡고 있던 경허의 속가 형 태허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데, 그 시간이면 절 내 방앗간에서 수월이 방아를 찧을 시간인데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태허가 물레방앗간을 들여다보니 수월이 돌확 속에 머리를 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온종일 나무하다 피곤에 지친 수월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러나 수월의 머리 위에선 수월의 머리를 금방이라고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큼 큰 방앗공이가 떠 있었다. 너무도 놀란 태허가 달려가 수월의 머리를 잡아 돌확에서 끄집어내자 방앗공이가 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쿵 하고 소리를 내며 돌확 속에 떨어졌다. 그 때서야 경허는 수월에게 너무 소홀했음을 느끼고, 수월에게 사미계를 준 뒤 일주일 동안 천수다라니경만 외우도록 했다. 지금껏 일만 했던 수월에게 다른 스님들처럼 수행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호사였다. 수월은 그에게 주어진 이레 동안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은 채 천수다라니를 외었다. 이레가 지난 한밤, 아랫마을에선 “불이야! 불이야!”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 휘황찬란한 환희의 빛, 평화의 빛이 삼매에 빠진 수월로부터 솟구친 것이었다.
공부할 기회를 얻기 어려워 한 번의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이가 어디 수월뿐이었으랴. 천진도인으로 알려진 우화 스님(1903~76)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뒤 늘 아버지가 못난이라고 미워해 소학교도 3학년 때 그만두고 14살 때 집을 뛰쳐나왔다. 정처 없이 떠돌다 함양 영각사라는 절에서 살던 일자무식인 뒷방 노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우화스님은 참선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어느 절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우리 은사 스님이 누구다’라고 함자를 댈만한 처지도 아니어서 어디 가서도 박대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어느 절집이나 먹을 식량이 부족해 안거를 나려면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가져가야 입방이 허용됐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 선사의 지도를 받기 위해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 갔지만 세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는 혼자 걸망을 지고 마을을 돌며 다른 사람 먹을 양식까지 지고 간 뒤에야 간신히 말석에 앉을 수 있었다.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기회는 기회가 아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기회를 얻은 우화에게만은 기회가 분명했다. 우화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이 기회를 허송세월한다면 언제 다시 참선할 기회를 맞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처절했다. 언제든 자신이 원하면 선방에 들어갈 수도, 쉴 수도 있는 다른 선승들은 공양을 들고 난 뒤나 밤이 깊어지면 졸기 일쑤였다. 하지만 우화는 잘려야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해 우화는 단 한 번의 안거 뒤 만공으로부터 견처를 인정받았다.
수월과 우화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법한 현재의 선방들이 과연 진정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공부할 기회를 찾지 못해 몸부림쳤고, 자신을 내던졌고, 헌신했던 수월과 우화에겐 분명 축복이 될 것이지만,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한 나태한 이들에게 그런 대우가 과연 복이 될 것인가. ‘절대’란 없는 것이 불법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한순간도 앉아있지 못한 이에게 3개월간 마음을 쉴 기회를 주는 것은 큰 복이 되지만, 오직 앉아있음에 빠져있는 이에겐 활동하며 일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며 복락의 길이 아닌가.
수행은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일 뿐이며, 정토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 마땅히 참선을 하고 수행을 했다면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것이 보은의 이치다. 그런데도 수행 자체가 지고지선이 된다면,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천국에 가고, 우리 교회에 오면 무조건 축복을 받는다는 광신도들의 외침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평소 남들이 싫어하는 사중일이나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거나 헌신한 대가로 ‘입방’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고, 수월이나 우화처럼 기뻐할 수행자들을 볼 날은 언제일까.
<발문>
수행은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일 뿐이며, 정토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 마땅히 참선을 하고 수행을 했다면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것이 보은의 이치다. 그런데도 수행 자체가 지고지선이 된다면,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천국에 가고, 우리 교회에 오면 무조건 축복을 받는다는 광신도들의 외침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