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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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불자가 되자

7~8월이면 통도사에는 온통 연꽃세상이 펼쳐집니다. 연(蓮)방죽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으로 인해 연꽃세상이요, 각종 수련회에 참석하여 수행정진을 하고 있는 불자들 모습들로 인해 또한 연꽃세상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입니다.
우리는 흔히 연꽃이 진흙탕 속에 자라지만 그 더러움을 자신의 꽃이나 잎에 묻히지 않고 올곧게 잎과 꽃대를 만들고 꽃을 피우기 때문에, 속세에 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의 꽃을 피우는 것에 비유하여 불교의 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흙탕이라고 해서 그 진흙탕을 전부 오염된 썩은 물로 미리 설정해놓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華嚴經)〕에서 『흙은 물의 성품과 함께해야하고, 물은 불의 성품과 함께해야하고, 불은 바람의 성품과 함께할 때 흙의 모습, 물의 모습, 불의 모습, 바람의 모습이 존재한다』고 설하신 것입니다.
즉, 「본래 부처를 잃어버리면 범부중생이라 이름하고 본래 내 부처를 찾으면 부처님이라고 이름한다」고 했듯, 본래 부처의 마음자리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본래 부처의 마음자리를 찾는 노력이 곧 수행정진(修行精進)입니다.

여기서 또 생각해야 할 것이 수행정진을 하는 방법이 한가지로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선이 좋은 줄은 알지만 참선만 좋은 것이 아니고, 염불이 좋은 것은 알지만 염불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며, 절이 좋은 것인 줄은 알지만 절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젊고 건강한 이는 절하는 것만큼 자기를 조복받는 수행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몸이 안 좋아 관절이 다 무너졌는데, 절수행이 최고라고 믿고 절하는 것만을 고집한다면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아져 드러눕고 말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지만, 하나 더하기 하나만 둘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넷에서 둘을 빼도 둘이고, 셋에서 하나를 빼도 둘이라는 평범한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또 흔히 수행 중에서 참선수행만큼 나를 찾아가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길만이 나를 찾아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아니하고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방법임을 각자의 인생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구의 강요에 의해,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의 『부처님이시여, 저 천상에 살고 있는 이들이나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무엇이 이렇게 속박하고 구속하나이까? 무엇이 우리들을 붙들고 있나이까?』하는 가르침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지금 찻잔을 들고 있습니다. 이 찻잔을 내가 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손이 붙들려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컵을 붙들고 있으면 있는 시간만큼은 컵만 내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컵에 내 손 또한 붙들려 있다는 이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무명(無明)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 연기(緣起)의 법칙으로 보면 무명(無明)이 생기는 원인은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무 조급하게 서둘러서 될 일도 아니지만,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드러낼 수 있는 내가 되도록 스스로를 다잡아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결국은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게으름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생각이 전도(顚倒)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 게으름입니다.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어두움이요, 무명이라는 어두움은 결국 사람을 욕심과 시기질투와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의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이 뒤바뀐 생각은 결국 의심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이 의심으로부터 생기는 부자유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엉클어진 실을 한 올 한 올 풀듯,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생을 두고 부단히 풀어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즉 참선만을, 염불만을, 간경만을, 절만을 최고의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신의 삶 속에 수없는 부처님 가르침과 스님들의 가르침을 교본으로 하여 자신의 생활리듬을 잃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찾아 나가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한 수행정진을 통해서 얻어지는 보리심과 지혜는 결코 하루아침에, 일순간에 얻어지는 그런 덕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낭패보기 일쑤입니다.
마치 누에가 21일 동안 뽕잎을 먹고 아방궁을 지을 것이라며 고치를 만들어 봤자, 옷을 짜는 직녀가 뜨거운 물에 삶아서 실을 뽑아버리면 그만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 논에 살고 있는 물쐬기란 놈이 농부의 발인 줄도 모르고 침을 놓고는 아랫논 물고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봤자, ??이놈이 겁 없이 나를 건드려???라고 생각하고 삽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아랫논 물고로 가서 물쐬기를 후려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미 농부는 물쐬기가 송사리나 미꾸라지, 붕어 등을 침으로 기절시킨 뒤 먼저 물고로 내려가 떠내려오는 고기를 잡아먹는 물쐬기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데, 미련한 물쐬기는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끊임없이 엉클어지고 반복되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데, 그 세상을 우리는 ‘오탁악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에나 물쐬기와 같은 절박한 상황을 우리들이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먼 옛날 인도에서 겪은 일입니다. 인도성지순례를 온 한 스님이??자신은 별로 필요가 없다??며 내게 미숫가루를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종일 열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했는데, 생각 없이 주고간 미숫가루를 한 입 털어 넣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인도는 지금처럼 생수를 사먹는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 하나로 앞뒤 가릴 것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가 순간적으로 죽음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불과 10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십명왕생(十名往生)이라고, 아미타불 열 번만 찾으면 극락간다는데, 그 순간에 아미타불이 찾아지겠습니까? 도리어 아미타불보다는 아쉽고 미진했던 날들이 생각나니 눈물이 핑돌고, 눈물이 핑도니 입에 침이 돌고, 침이 도니까 물에 타먹을 때 쉽게 녹으라고 넣어놓은 설탕가루가 녹아서 그나마 기도를 살짝 열어줘서 숨통을 틀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절박한 순간에 평상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천일이면 천 번 부르는 것이 되듯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짧은 시간에 무엇을 이루려는 기도나 정진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평소에 진지한 삶을 살아가는 것, 진지한 삶의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지혜를 쌓아가는 것, 이것이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이면 천재보(千載寶)??라고 했습니다. 삼일만 지극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도 천년을 덮고도 남을 보배스러움을 얻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요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내가 변해야 주변도 바뀝니다. 한사람한사람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많은 이들의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욕심이 없는 사람, 어리석지 않는 사람,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미 공포와 두려움도 없다고 했습니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넉넉한 모습이겠습니까?

손수레에 짐을 실고 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 그 손수레에 짐을 실고 언덕을 올라가려고 할 때 누군가 뒤에서 살짝만 밀어줘도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또 내리막길에서는 누군가 뒤에서 살포시 잡아주기만 해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고, 평탄한 길을 걷고 있노라면 가는 길목에서 말벗이라도 되어주면 즐거운 길벗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각자의 인생사에서 한 명, 두 명, 세 명으로 늘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불자들이 앞장서야 될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산중일기》라는 책에 보면 「눈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참사랑이라면 눈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그만큼 더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 눈에서 멀어졌다고 마음까지 멀어지는 것은 참우정이 아니다. 참우정이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음은 더 그만큼 가까워져야 하는것이 아니겠는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 눈에서 멀어지면 사람이 멀어지고 세월이 너무 길어지면 훗날 만났을 때 더 서먹서먹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자라면 가족들 간에도 서로 자기표현을 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화가 나거들랑 화가 나는 이유를 얘기해주고, 좋은 마음이 들거들랑 좋은 마음을 전해주고, 잘못하는 일이 있거들랑 자애로운 마음으로 지적해주면서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자기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바로잡습니다
8월호(258호) 이달의 법문 내용 중 6쪽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에서 한자 ??有??는 ??唯??의 오기입니다. 널리 혜량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발문1>
내가 변해야 주변도 바뀝니다. 한사람한사람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많은 이들의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욕심이 없는 사람, 어리석지 않는 사람,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미 공포와 두려움도 없다고 했습니다.



<발문2>
진정한 불자라면 가족들 간에도 서로 자기표현을 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화가 나거들랑 화가 나는 이유를 얘기해주고, 좋은 마음이 들거들랑 좋은 마음을 전해주고, 잘못하는 일이 있거들랑 자애로운 마음으로 지적해주면서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자기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