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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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도그마로 인한 분노와 폭력을 화해와 사랑으로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종교는 인간이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를 갖고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행복하고, 좀 더 평화롭게 살도록 이끄는 성인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분쟁의 절반 이상이 종교 갈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인간을 무지의 바다에서 건저 내 광명세계로 이끌어야하는 종교가 때론 그 도그마 때문에 인간을 얼마나 무지로 이끄는지를 극악한 폭력과 살상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 개봉돼 잔잔한 파문을 낳고 있는 <그을린 사랑>은 종교적 도그마와 폭력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하기에 더 할 나위 없는 영화다. 지난 7월 21일 개봉돼 6주 만에 5만 관객을 돌파해 예술영화로는 올해 가장 많은 관객을 붙든 이 영화는 세계 영화제의 상을 휩쓸고 심사위원들부터 극찬을 받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긴 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로 꼽는 캐나다인 감독 드니 빌뇌브가 연출한 이 영화는 비극의 한 가족사를 담고 있다.
영화는 유대교의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중동, 기독교인들이 얽혀 죽고 죽이는 살육이 끊이지 않는 중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국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빌뇌브 감독은 “시리아와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사이에 낀 가상의 작은 국가를 배경으로 했다”고 밝혔다. 영화의 일부가 레바논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캐나다에서 자란 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가 비서로 일했던 ‘공증인’ 앞에서 어머니의 유언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살았을 때도 어느 어머니와는 달리 넋이 반쯤은 나간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죽은 다음 유언마저도 유별나다. 자신의 주검을 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묻어주고, 비석도 놓지 말고, 이름도 새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주검도 땅을 보도록 엎드리게 해달란다. ‘약속을 어긴 자는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어머니 니왈은 어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일까.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남매에게 어머니는 편지를 남겼다.
‘잔느, 네게 봉투를 하나 주마. 너희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란다. 그를 찾아서 이 편지를 전하거라.’
‘시몽, 네게 봉투를 하나 주마. 너희 형에게 보내는 편지란다. 그를 찾아서 이 편지를 전하거라.’
‘그들에게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너희에게도 편지를 줄게.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햇빛 아래에.’
남매는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다레쉬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과 소지품 사이에서 나온 젊은 시절의 작은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소극적인 시몽을 두고 잔느는 홀로 중동으로 ‘어머니의 역사’를 찾아 떠난다.
어머니 나왈 마르완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나왈은 처녀 때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사랑에 빠진 청년은 기독교인들이 절천지원수처럼 여기는 무슬림 난민이다. 나왈의 형제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나왈의 ‘사랑’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나왈은 그 청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나왈은 가문을 더럽힌 여자로 낙인찍힌다. 그의 아이가 태어나도 키울 수가 없다. 나왈의 할머니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발뒤꿈치에 문신을 새긴 뒤 고아원으로 보낸다. 나왈은 “언젠가는 너를 꼭 찾을 거야. 우리 아가”하며 눈물로 아기와 작별을 고한다. 이것이 바로 나왈이 유언에 밝힌 ‘약속’이었다. 그런데 나왈은 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일까.
할머니는 마을에서 낙인 찍혀 더 이상 그 마을에서 살기 어렵게 된 나왈을 도시의 친척에게 보내 공부를 하게 한다. 나왈은 대학생이 된다. 그래서 외국 난민을 추방하려는 기독교 민족주의에 맞서 학생운동을 한다. 그 때 자기의 고향인 남부의 기독교인 마을이 피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왈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고아원에 있을 아기의 안위다. 그는 고생 끝에 고아원을 찾지만 고아원은 폭력으로 폐허가 되어있다. 나왈은 이슬람의 대장 샴세딘이 고아들을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나 나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삶을 바꿀 사건과 맞닥뜨린다.
기독교민병대원들은 차에 탄 사람들이 무슬림임을 확인하고는 어른,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로 총을 난사한다. 그리고 마침내 차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운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로 기독교인임을 증명해 구사일생으로 버스에서 생존한 나왈이 찾아간 데레사캠프도 폐허로 변해있고, 아이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나왈은 기독교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무슬림학살 장면을 본 데 이어 그들에 의해 자기 아이까지 죽었다고 믿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오른다. 기독교민족주의 지도자의 집 과외 교사로 들어간 나왈은 지도자를 암살한다. 그리고 감옥에 수감된다. 그곳에서 수없는 고문을 받는다. 그곳에 국내의 고문기술자로 지금은 목사가 되어있다는 ‘이근안’을 연상시키는 ‘아부 타렉’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아부 타렉은 나왈에 대한 성고문을 자행한다. 그러나 나왈은 무려 15년 동안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계속된 성고문으로 인해 나왈은 임신하게 되고, 감옥에서 쌍둥이 남매를 낳게 된다. 나왈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옥에서의 고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부 타렉의 존재다. 나왈은 자신을 고문했던 아부 타렉이 과연 누구인지 그 진실을 알고 만다.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홀로 감내하기 어렵게 된 잔느는 쌍둥이 남동생 시몽을 부른다. 시몽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형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 남매가 발견한 진실 앞에서 눈물을 터트리는 사이 관객들도 숨을 멎을 듯한 충격 앞에 내동댕이쳐져 할 말을 잊는다.
왜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남매에게 송두리 채 알게 했을까. 빌뇌브 감독은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려면 침묵과 분노 뒤에 감춰진 유년의 상처를 탐험하는 일이 필요하다”며 “쌍둥이 남매가 어른이 되려면 어머니의 침묵 속에 존재하는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결코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세세히 안다면 그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결국 부모와도 화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너희들의 탄생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그 배경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함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란다.”
어머니가 남매에게 남긴 이 마지막 글귀엔 종교의 도그마로 인한 분노와 폭력으로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서도 그것을 분노로 재생시키기보다는 화해와 사랑으로 극복하려는 한 여인의 비장함이 담겨 있어서 또 한 번 관객들의 숨을 멎게 한다. 역시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 개인과 국가에 주어진 역사가 어떻든 이를 분노와 폭력으로 여기기보다는 사랑과 자비로 분노와 폭력을 끊어내는 결단이 이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광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왈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