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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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는 삶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전 주지
   구룡사 회주

오늘은 음력으로 7월 백중, 우란분재일입니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각각 포살법회를 열었는데, 오늘은 하안거 해제일이니까 자자일(自恣日)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살다보면 스스로의 허물은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상대의 허물은 쉽게 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물론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반사로 느끼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포살법회와 자자일의 의식을 오늘과 같은 날 절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또는 사회에서도 수시로 행하여 스스로 그 허물을 파악하고 다짐하고 확인하고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란분재일의 유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시간적으로 2600여 년 전에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러한 일을 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도 지금과 다를 것 없이 사람이 살던 시대입니다. 물론 고도로 발달한 기계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사고로 과거를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감안하여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신통재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蓮尊者)는 출가하기 전 실크로드를 통해서 장사를 했던, 지금으로 말하자면 무역상이었습니다. 큰 사업을 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재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대단히 살생을 많이 한 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역시 가족을 비롯하여 그 누구, 그 무엇인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그 시대에 맞는 행위를 이어져 내린 것이 아니었겠는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교적 안목으로 보면 살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업을 씻어드리기 위해 목련존자께서는 자자일이기도 한 이날 불보살님들의 가피와 위신력을 청하고 대중스님들을 모시고 천도재를 지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란분재일의 유래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한 업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났다하더라도 윤회하는 세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지은 행동의 결과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경중에 따라, 극락만은 못해도 천상락을 누리는 천당이라는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인간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노여움으로 가득 찬 아수라의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축생의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아귀의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지옥의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천당에 태어났다하더라도 그가 지은 업이 소멸되지 않고서는 윤회의 세상을 벗어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도를 윤회한다는 것은 자신의 업장이 아직도 다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업에 따라 다시 나고 죽는 고통을 겪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년 우란분재일을 앞두고 49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연년이 기일을 맞이해서 제사를 지내고, 지장재일을 맞이할 때 마다 백년위패를 모시고 축원하고 기도를 올려 그 영가들이 설혹 천상락을 얻어서 극심한 고통은 겪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했다면 삼독번뇌와 오욕락에 시달린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라고 했듯이 보리심을 여의지 않으면 그가 머무르는 곳이 다 편안하고 넉넉한 세상이요, 반대로 삼독심에 물들어있으면 그가 머무르는 곳은 모두 다 삼악도라는 말씀도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요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이라고 했듯이, 죄라는 것은 본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기도가 되고 정진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매순간순간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더 열심히 살자. 더 많은 곳에 함께 하자.”
진정한 불자라면 전생을 믿는 것처럼 내생도 믿어야 합니다. 어제가 있었던 것처럼 내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잘 살면 어제도, 내일도 잘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파에 찌들어서 못된 성품이 영근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만취한 사람은 자신이 술에 취한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여기에 견주어 설명하자면,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자신이 술이 취했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면 더 취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자리는 마음속에 선근이 가득한 청정무구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어떻습니까? 가령 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이 놀부 같기를 원할까요? 흥부 같기를 원할까요?
아마도 이 시대 대부분의 부인들은 이상은 흥부이고 현실은 놀부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놀부집이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은 있어도, 흥부집이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은 없는 것이 이를 반영한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인 남편들의 입장에서는 이상이고 현실이고 필요 없고, 오로지 나는 나인 겁니다.
열반경에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써 지옥에서 받을 중대한 업보도 현실 세계에서 가볍게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기도하고 정진하면서 확인하고 다짐하고 인식하고 다잡아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점점 가까이 하여 구경에는 나와 둘이 아닌 자리로 만들려는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이생에서 가볍게 터치해서 받을 수 있는 업을 붙들어 놓고 붙들어 놓고 하다가 사후에 지옥에 떨어져 무겁게 받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작자수요, 자업자득이요, 자승자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금강반야는 지혜요, 금강삼매는 선정’이라고 했습니다.
고요 적적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게 되면 바른 지혜와 바른 소견을 얻게 됩니다. 즉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 중대한 업을 이 세상에서 갈무리 칠 수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가봤느니 안 가봤느니만 따지다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자라면 최소한 하루에 한 시간씩은 나를 찾는 공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부터 나아가 사회 전체에 이르기까지 함께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되돌려주는 시간을 갖는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바른 지혜와 바른 소견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마음이라면 어리석을 수가 없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어리석지 않으면 성낼 일도 없고, 또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규범 속에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라야 선정 속에서 삼매를 닦으면서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정과 삼매를 닦는 사람이라면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의 생멸하는 모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있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귀로 듣는 것도 취사선택을 내가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선정삼매의 눈으로 하느냐, 무명(無明)심으로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최첨단의 과학문명시대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변화를 가장 무서워하고 있는 지 스스로 판단해볼 일입니다. 잘 쓰면 약이 되는데 못 쓰면 독이 되는 것이 우리들 주변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평범하고 안이한 눈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선정을 닦지 않고는 세간의 일도 알 수가 없는데, 삼독과 욕락에 찌들어 있다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일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세상을 떠난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닌 이사무애(理事無碍)한 그 일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선정과 삼매의 힘이 없으면 하는 일마다 망할 일만 하고, 속을 일만 하게 됩니다. 결국 그 허물을 들여다보면 자기의 과욕과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만 참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일인데도, 그 성내고 화내고 신경질 부리는 결과물로 반사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입니까?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데, 육바라밀 가운데 인욕의 그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이치에 끄달리고, 신구의 삼업으로 무거운 업만 짓다가 결과적으로 삶의 진정한 모습은 잃어버린 채 또 여름철 폭풍우에 휘젓기는 저 먹구름 같은 현상은 어찌할 것입니까?
이시대의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오직 나만은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이들이 우리들 주변에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고통과 괴로움은 어찌할 것입니까?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늘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게 마련인데, 그것을 확연히 들여다보았을 때는 어찌할 것입니까? 시간을 너무 빨리 소모했고, 인생 너무 많이 탕진했다고 후회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100살을 살고, 1000살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정녕코 참 성품 자리에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은 집으로 이사하듯 마음의 집도 이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새집을 지어서 이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살이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젊고 건강하게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면 나이는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명의 얼굴 일뿐이고 무지몽매한 내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젊게 살려고 얼굴을 뜯어 고쳐본들 반드시 내 스스로 떠나야 되는 그 날은 온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면 내 수명은 하루가 줄어들었고 내 죽음은 하루가 가까워졌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쪽은 멀어졌지만 한쪽은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물질적인 것에 깃든 생로병사, 즉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떠나야 되는 그 모습이나 우리의 삶 속에서 녹녹히 베여있는 인생살이 중에 여덟 가지 괴로움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모두 허망한 것인 줄을 알게 되면 어떤 재앙이나 어떤 고통이 설혹 내 가까이 다가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는 참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뒤에 남겨진 사람의 가슴속에 내가 살아 있다면 나는 결코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듯,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수 없는 영가 가족들도 우리들 가슴속에, 뒤에 남아있는 가족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가라면, 그 분은 결코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정녕코 좋은 몸 받아서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했던 우리들과 함께 살았던 그 인생에서 좀 더 달라진 모습으로 변화된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우리들은 마지막 생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가장 가치 있는 모습은 어떠했는지,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었는지 되뇌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습 중에서 최소한 나와 함께 살았던 가족들에게 얼마만큼 사랑을 나눠주고 그 가족들로부터 나는 얼마나 사랑을 받은 삶을 살아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란분재일은 불안한 삶의 현상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당한 내 모습과 현실에서의 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 함께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