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막상 우리가 직접 선어록을 읽다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거기에는 그들 사이에 공용되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불교, 그 중에서 선불교의 선사들 사이에 사용되는 대화 논리가 있다. 이 대목에서 꼭 알아야 할 사안이 있다. 그것은 당나라 시대 선어록에 나타난 지식이론은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에 입각한 불성사상佛性思想이고, 그들의 수행이론은 돈오사상頓悟思想이라는 점이다. 진여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이란 진여를 기본으로 해서 연기설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편 돈오무심사상이란 자기 자신의 본래성을 단박에 자각하여 무심하게 그 본래성에 내맡겨 사는 것이 수행자 궁극적 삶이라는 사상이다. 선어록을 읽기 위해서는 이 둘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진여가 무명을 만나 삼라만상으로 전개하는 기틀을 아리야식이라고 하는데, 법상종계통에서는 이 아리야식을 생멸하는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진여연기론을 주장하는 법성종계통에서는 진실과 허망이 화합된 것으로 정의한다. 진여에는 인연과 결합하여 변화하는 작용과, 어느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인연과 결합하여 변화하는 진여의 작용에 의해 중생들의 번뇌의 차별상이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변하는 진여의 작용성은 불생불멸한다. 이 불생불멸하는 진여의 작용성을 단박에 자각하는 것이 돈오이다. 그리고 진여를 가리는 번뇌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그 자체는 무상하다. 그것은 결코 자기동일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심無心’의 상태가 되면 저절로 소멸한다. 선종은 이 두 가지, 즉 진리론으로는 진여연기론 수행론으로는 돈오무심을 축으로 해서 전개된다.
그러면 진여란 무엇인가? 진여(眞如 tathatā)의 말뜻은 “있는 그대로의 그 무엇”이다. 매우 난해한 말이지만, 이것은 언어나 사유로 그리고 행위를 매개로 하여 뭐라고 규정하기 이전에 우리 앞에 즉자적으로 주어지는 그 무엇을 말한다. 이것은 말을 바꾸면, 행위·언어·사유의 규정방식에 따라 우리에게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타자絶待他者라기 보다는 연기에 의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규정방식에 의존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규정방식이 무수한 만큼 진여가 드러나는 양태도 무한하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선사들은 진여를 몸소 깨칠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수행의 당사자가 자기만의 주체적 행위·언어·사유로 그것을 손상 없이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사들은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과 그 체험을 어떻게 언어적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했다.
선어록의 논법은 진여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을 바탕으로, 그것의 깨달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진여의 뜻을 위에서도 보았듯이, 진여는 그것의 규정하는 방법 내지는 표현하는 양식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런 연장선에서 선사들은 깨달음을 매우 중시한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전통은 『육조단경』에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선종의 표어처럼 얘기되는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송대에 이르러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저자 엄우嚴羽는 이것을 ‘오묘한 깨달음 妙悟’란 말로 집약했다. 그는 당시 지식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논의되는 선불교의 이론에 입각하여 한漢·위진魏晉·성당盛唐의 시를 평론한다. 그러니까 선의 이론을 기준으로 잘된 시와 그렇지 못한 시를 품평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저 선을 하는 바른 길도 오직 오묘한 깨침에 있고, 시를 쓰는 바른 길도 역시 오묘한 깨달음에 있다. …<인용자 생략>… 생각컨대 깨달음이란 당사자가 해야 하는 것이고, 本色으로 해야 한다.
大抵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 …<인용자 생략>… 惟悟乃爲當行, 乃爲本色.
<何文煥 編訂, 『歷代詩話』, 臺北: 藝文印書館, 民國63年, 442쪽>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송나라 시대에 지식인들이 선의 요체를 오묘한 깨침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송대 지식인이 공인한 오묘한 깨침 중에서, 그것은 당사자가 직접해야 한다는 입장과 본색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의 선불교계와도 잘 깊은 연관이 있는 임제 선사의 경우를 사례로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한다.
3.
수행자 자신이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말은, 마조 이래 전해오는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임제 선사는 이 말을 현장감 있고 박진감 있게 자신의 체험을 실어서 당시 수행자들에게 외친다. 자신의 본래성은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임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시방 삼세 부처님과 조사들도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오셨고, 지금 참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법을 구하기 위할 뿐이니, 법을 얻어야 비로소 끝나고 얻지 못하면 예전대로 다섯 갈래의 윤회에 떨어진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심법心法을 말한다. …<인용자 생략>…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내가 법을 설할 때에 무슨 법을 설하는가? 마음자리의 법〔心地法〕이다.
 <백련선서간행회, 『임제록·법안록』, 경남: 장경각, 1989, 47-48쪽>
그러면 이 “心地法”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밖에서 따로 구하지 말라고 한다. 불법은 애써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쉬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임제 선사는 밖에서 구하려는 이들을 염소나 양이 입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는 안에 무엇이 있다고 해서도 안 된다고 경계한다.
대덕들이여! 내가 밖에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안으로 알음알이를 내어 벽을 보고 앉아서 위 잇몸에 혀를 찰싹 붙이고 꼼짝 않고 담담히 앉아 있다. 그리고는 이것이 조사문중의 불법이라고 여기는데 정말 잘못이다.
<백련선서간행회, 『임제록·법안록』, 경남: 장경각, 1989, 81쪽>
철저한 주체성에 입각한 임제 선사로서는 움직이지 않는 청정의 상태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부처를 완전한 경지라고 여기지 말라는 충고도 이런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이든 내면화되어 고정되면 그것은 도리어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수행인(無依道人)을 달아매는 말뚝이 되고 만다. 임제선에서는 그런 부자유는 용인되지 않는다. 이런 그에게 부처를 내면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말기의 젊은 선승들은 자신감을 잃고 부처에 의지하고 유명하다는 종사들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설법을 들으러 몰려 다녔다. 이들을 향해 임제는 말한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끄달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 자유자재해진다. 도를 배운다는 제방 납자들치고 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나온 사람이란 하나도 없다.
<백련선서간행회, 『임제록·법안록』, 경남: 장경각, 1989, 74-75쪽>
이것은 당시 선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임제록』의 표현대로 “경박스럽게 제방의 장로들에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나불거리는” 무리들에게 하는 경고이다. 바른 안목과 자신의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지, 그 어떤 외부적인 권위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임제는 자신이 처음에는 율종에 뜻을 두고 그 뒤에는 경학에 뜻을 두었지만 이게 모두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도 닦는 길을 택해 비로소 안목이 분명해졌다고 술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