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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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불교에 통달하다

기암 법견(奇巖 法堅, 1552~1634)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조선중기의 문장가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기암 법견을 “도리를 알고 문장을 잘 지으며 유교와 불교 서적들에 통달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비문 역시 “내전內典에 통달하고 곁으로 자사와 기타 서적의 정수를 모두 두루 갖추었다.”고 하였다. 선조의 사위였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은 “대화를 나누니 고매하고 시원하여 매우 상쾌한 점이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일평생 수행자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간 사람들은 그를 임진왜란 당시 승장僧將이며 산성을 쌓았던 승려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작 승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선교학에 뛰어난 수행자였다.
그 시를 보건대 충아(.雅, 담박하고 깨끗함)하고 원호(圓好, 매끄러움)하여 소순蔬荀의 기미氣味가 적었으며 게偈의 형식으로 문답한 것을 보더라도 대부분 의리義理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문장 또한 순방(淳., 순박·호방)하고 장후(長厚, 유장하고 두터움)하였으며 제자諸子와 사책史冊의 내용을 두루 통하였으니, 얼마나 널리 섭렵하였는지를 더욱 알 수 있었다.


1647년(인조 25) 가을에 그의 문집에 서문을 써준 이민구李敏求가 기암의 시를 두고 한 말이다. 담박하고 깨끗하며, 순박하고 호방하다는 것이다. 글 따라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이민구가 쓴 기암의 비문은 “오직 자애롭고 참을성이 많아 어릴 때부터 이미 그랬으며 60갑자가 지나도록 성품이 관대한 인물이 바로 대사였다. 27년간 구름 따라 노닐 듯하였으나 예배할
때면 천둥이 치는 듯하다가도 침묵하였다.”고 기암의 성품을 묘사하였다.


기암 법견은 청허 휴정의 제자로 전라도 부안扶安사람이다. 사명 유정(四溟 惟政, 1544~1610)의 사제師弟이기도 하다.


單刀橫把跨天際 단도횡파과천제
斬盡前來佛也僧 참진전래불야승
霜刃指山崖欲烈 상인지산애욕렬
寒光當處冷氷氷 한광당처랭빙빙
聲前有喝聞千里 성전유갈문천이
句後無言透萬層 구후무언투만층
箇裡.量無受授 개이적량무수수
何人傳得古燃燈 하인전득고연등
단도 비껴 잡고 하늘가에 뛰어 올라
앞에 오는 부처와 조사를 모조리 베네
칼날이 산을 향하면 벼랑이 무너질 듯
싸늘한 빛 닿으면 차갑게 얼음 맺힐 듯
소리 이전의 할은 천 리에 들리고
일구一句 뒤의 무언은 만 층에 사무치네
아무리 헤아려도 주고받을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옛 연등을 전해 얻을까


청허 휴정이 기암에게 선종禪宗을 물은 시의 운을 써서 답한 시 「답서산문선종운答西山問禪宗韻」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불법佛法이 지닌 근본 대의大義를 물은 것이다. 무엇이 깨침인가 한 소식 일러보라는 것이다. 그러자 기암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비를 만나면 아비를 죽이는 것이 깨침이라고 하였다. 소리 이전의 할이나 무언無言은 천 리에 들리고 만 층에 사무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일러주어도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 선의 요체요 깨침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청허가 깨침을 구하니 시를 바쳐 그 뜻을 표하니 말 한마디에 딱 들어맞았다. 또 “사명당에게 참가하여 능력을 다 발휘하였는데, 가죽을 주워 모으고 뼈를 본뜨며 모레를 걸러 구슬을 가려내는 것처럼 하여 무량세계의 무수한 중생들로 하여금 용맹히 정진케 하였으니, 한 남자에게 우리의 도가 이미 응축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기암은 스승 청허淸虛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은 후 북쪽의 묘향산부터 남쪽의 지리산까지, 그리고 서쪽의 구월산과 동쪽의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팔도를 두루 다니면서 공부를 점검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전란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청허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제자들은 마음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왕에게 나라를 지켜내겠다고
맹세했던 스승의 뜻과 함께 전장에서 용맹을 과시했다. 그들에게 수행과 중생구제 외에 우선시되는 것은 없었지만, 나라를 구제하는 것 역시 수행자가 살아있는 근복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실록』은 당시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笠巖山城은 험준한 기암절벽으로 적을 피하는 데 있어서 첫째가는 곳이다. 지금 수축을 거의 마치고 또 사찰을 세워 영구한 계책으로 삼고자 현감 이귀李貴가 중 법견法堅을 불러 그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만약 조정에서 부총섭副總攝이라는 관교官敎를 성급成給해주고 또 인자印子를 내려 권장한다면 공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입암 산성도 이귀의 말대로 법견을 부총섭으로 삼는 것이 시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관교官敎를 만들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허하였다.


1594년(선조 27) 2월 27일 비변사가 왕에게 아뢴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다. 입암산성笠岩山城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해발 654m의 입암산 능선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처음 성을 쌓았던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2.6m∼3.5m 내외로 쌓았고, 일부 암반이 있는 곳은 1∼2m 내외로 쌓았는데, 아마도 왜란 당시 기암의 지휘하에 스님들과 백성들이 힘을 모아 작업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산성 안에는 안국사安國寺도 있다고 하였는데, 산성을 수호하는 군영사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何人着意勞驂騑  하인착의로참비


屬國區區布漢威 속국구구포한위
盃渡蜃樓天縹緲 배도신루천표묘
櫓搖鯨額海依俙 노요경액해의희
連將蹈海羞秦帝 연장도해수진제
子欲棄桴嘆道微  자욕기부탄도미
爭似吾師憐世故 쟁사오사련세고
孤帆杳杳落斑衣 고범묘묘락반의


어떤 분이 피곤하게 수레 몰 뜻을 두었는고
속국에서 구구하게 조정의 위엄을 펼치는 일
까마득한 하늘 아래 신기루 건너는 목배木盃요
아스라한 바다 위에 고래 등 흔드는 삿대로세
노중련은 진제가 부끄러워 바다를 밟으려 했고
부자는 쇠미한 도를 탄식하며 뗏목 타려 했지
그보다는 우리 스님이 세상 일 동정하여
아득히 배 타고 일본(斑衣)에 감이 더 나으리


기암이 사형인 송운 유정(1544~1610)이 일본에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松雲之日本國) 지은 시이다. 송운은 전후 네 차례에 걸쳐 대표로 나아가 적진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져 논리적인 담판으로 굴욕적인 요구 조건을 물리쳤다. 1604년에는 스승 청허의 부음을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기암의 이 시는 그의 학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노중련은 진제가 부끄러워 바다를 밟으려 했고”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이 위魏나라 사신과 담판하면서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바다를 밟고서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기史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부자는 쇠미한 도를 탄식하며 뗏목 타려 했지”는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라고 했던 『논어』의 글을 인용하였다. 기암은 노중련이나 공자는 포악무도함이나 도가 쇠미한 것을 한탄하여 바다를 건너려 하였지만, 사명당은 “세상일을 동정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이 더 낫다.”
고 하였다. 전쟁을 하루속히 마무리 짓고 조선의 백성을 구하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면 그것이 노중련과 공자의 바다를 건너는 이유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사형과 사제였지만, 그 우애가 친형제만큼이나 두터웠다고 하였다.
그가 83세로 열반하자 깨끗한 몸으로 다비를 거행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돌로 된 종 속에 모아두었으며 그 종을 유점사의 서쪽 산기슭 위쪽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