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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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숨은 가을을 다향으로 마신다

 직지사 카페 ‘산중다원’에서


이서연
시인


꽃 꿈에 목어가 황금물고기가 되어 헤엄치는 순간, 맨몸으로 물에 누워서 먼 하늘만 뻐끔거리고 보다가 알람 소리에 일어나 새벽기차를 탔다. 저마다 자리는 달라도 그 어디에선가 열심히 살아갈 사람들이 총총 새벽을 열고 있다. 괜찮은 하루를 열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김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에 어쩌다 끼는 날이면 여기저기 설정해 둔 비밀번호들을 종종 잃어버리고 허겁지겁 사는 내가 초라해지곤 한다. 게다가 사는 일에 발버둥 치는 사람들 표정들 속에서 가끔 벽시계 초침이나 오선지에 흩어져 있는 음표들, 갯바위를 누비를 작은 게들… 뭐 이런 것들이 겹쳐 보이는 어지럼증이 있다. 가로수가 옷을 바꾸어 입으려는 계절에 기차를 탄 건 이런 어지럼증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숙이고 가는 사람들의 무거운 표정들을 보다가 노랗게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눈은 구름을 향하고, 제법 옷처럼 익숙하게 쓰게 된 흰 마스크에 가려진 코는 숨쉬기가 편해졌다. 역시 나를 위해 바람이 떼어 놓은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즐겁다. 지금부터 갇혔던 시간의 빗장을 풀어본다.
학이 모여들었던 풍경이 어떠했을까 마음으로 그려보며 황악산 가슴으로 들어가면 계곡 물소리가 어제 다녀간 듯 오늘도 잘 다녀가라는 인사처럼 들린다. 그 인사에 귀가 맑아지니 잠시 흩어졌던 마음이 모아진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일주문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송하 조윤형의 글씨로 “황악산직지사” 현판이 새겨져 있다. 발걸음을 대양문, 금강문과 천왕문을 향해야 하지만 습관처럼 무시로 젖어드는 상념의 찌꺼기를 놓아 버릴 수 있는 자리는 우선적으로 계곡이라 계곡으로 발길을 돌려 올라가 본다.


아도阿道의 노래인가 사명四溟의 숨소린가
바위를 두드리는 보살의 몸짓인가
자네도 몸 담가 보소 천불선원 따로 없네
- <직지사 계곡> -


여름엔 몸을 담그고 가을엔 마음을 담그는 계곡을 올라가면서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直指人心 見性成佛’ 즉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참된 마음인 불성을 깨치면 부처를 이룬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따라 지어진 ‘직지사’라는 명칭을 생각해 본다. 소소한 것들도 쌓이면 결코 소소할 수 없어 늘 번뇌는 적은 것에서 비롯되어 커진다. 작은 불씨가 삽시간에 산을 태우듯 가슴에서 씻어내지 못한 아픔 쪼가리가 의미 없이 삶을 끊어내는 일들이 허다한 것이 세상사다. 산사는 그런 세상사에 고달파진 몸에 흐르는 시간과 마음에 흐르는 시간을 숨 한 번 고르는 그 찰나에 교차시켜 태운다.
부처로 들어가는 길을 내어 주는 곳이 산사다. 더구나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는 직지사 만세루는 황악산을 떠받들고 있는 듯 보인다. 살다보면 전생 업장 탓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협박을 받고 움츠리게 되는 날이 있다. 게다가 위장된 위선에 옳고 그름의 길도 여지없이 망가진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시절도 맞이한다. 만세루는 이런 시기에 필요한 산의 기운과 부처님의 기운을 함께 받게 해 준다.


황악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항상 우아한 자태다. 오고 가는 구름이 그 풍경을 실어 나른다. 마찬가지로 본마음은 그 자리에 있건만 0.1초에 수천의 생각이 번뇌를 실어 나른다. 이 번뇌의 한끝을 끊어주실 천 분의 부처님이 계시는 비로전에 닿는 순간, 생각이란 회초리에 휘둘렸던 몸부터 편안해진다. 제법 가을빛 하늘을 닮아가는 비로전 동자와 눈을 맞추어 인사하고 도량을 돌아본다. 관음전에서 젊은 수도승의 염불소리가 하얀 구절초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염불소리를 듣고 자랐는지 관음전 앞 두꺼비 바위가 예년보다 커 보인다. 오유지족五唯知足 샘물을 한 잔 마시니 오래전 서옹스님으로부터 이 글귀를 받고, 휘어지는 자존심 속에서도 견뎌 올 수 있었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변함없는 心입니다”는 서각의 글귀를 보며 다시 도량을 돌다가 ‘동국제일가람 황악산 직지사’라 쓰인 리플릿을 읽었다. 고려의 태조 19년(936)에 능여대사에 의해 도량이 커지고 조선시대에 학조대사와 사명대사가 머물며 이름이 알려졌다는 구절을 읽으니 작가로서 무명無名이 길다고 느꼈던 게 잠시 부끄러워진다. 언제 이름이 남느냐보다 어떻게 남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거늘….


능여能如의 손끝에서 마음도 측량될까
햇살에 꿈틀대는 탐진치 재어보니
내 마음 바로 보라는 뜻 온 도량에 가득하다
 - <내 마음 바로 보라> -


착한 바람 덕에 새소리까지 머리카락 사이로 흐른다. 노을빛처럼 붉게 물든 감나무 사이로 직지사 보물이 간직되어 있는 직지성보박물관이 보인다.
마당에 전시된 석조유물들만 보더라도 천년의 향기가 느껴진다. 마스크 때문에 코로 향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산사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내음은 온몸으로 마시는 새로운 재주가 생기고 있다. 물론 찻집에서 마시는 차는 여전히 오감을 살린다.
직지사의 ‘산중다원山中茶室’은 절맛, 산맛, 차맛이 잘 어우러진 분위기의 아담한 찻집이다. 아늑한 관음보살같은 품이 필요한 이에게는 실내가 좋고, 자연의 기운이 필요한 이게는 바깥 자리가 좋을 것 같다. 어느 자리라도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혹은 홀로라도 자신과 마주 앉아 차 한잔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적어도 삶의 무게에 허덕이지 않는 여여함이다.
어느 산사나 찻집의 메뉴는 다양하면서 비슷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곳은 대추차를 비롯해 송차, 약차 등 직접 담근 다양한 차들이 오래된 산중다원의 브랜드가 되고 있다. 맛이 그만큼 깊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곳 다원의 차에는 시의 향기까지 깃들어 있다는 소문이 있다. 황악산이 낳은 백수 정완영 시조시인의 시가 다원의 벽에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 푸른 산맥이 남쪽으로 흐르다가/한번 불끈 힘을 주어 추풍령을 만들었고/또 한 번 구비를 틀어 황악산을 앉혔지요/산이 높아 골이 깊고 골이 깊어
절은 사는데/실꾸리 감았다 풀 듯 겨울 가면 봄은 또 오고/새 울면 새가 운다고 지줄대며 흐르는 물/목 트인 인경소리가 골안개를 걷어내면/흐르는 개울물 소리 핏줄처럼 흔들리고/내고향 천년 직지사 벌떼처럼 이는 솔빛/그 옛날 사명대사님이 절에 와 머리 깎고/산과 물 정기 받아 큰스님이 되신 후에/불바다 임진왜란을 몸소 막으셨대요/일찍이 김삿갓도 이산이물 찾아와서/직지사 가는 길이 왜 굽었나 노래하며/떠가는 구름도 한 장 물빛 보태놨대요/꺾어 든 두릅순과 더덕 취 고사리순/손 끝에 마음 한끝에 산 냄새가 묻어오고/뻐꾸기 울음소리도 바구니에 담겨와요/아빠가 밭을 갈면 쟁깃날에 해가 뜨고/엄마가 씨 뿌리면 울던 아기 잠도 들고/황악산 두루 삼십리 날빛 밝아옵니다”
- 정완영 <직지가 그 산 그 물> -


이 시를 대추차에 담아 마시고 싶다는 분의 넉넉함 덕에 난 다래와 레몬, 생강을 넣어 끓인 약차를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청명한 날씨 속에 가을 정취가 그윽하게 퍼지고 있는 다원을 둘러보는 동안 따끈한 차에 떡도 두 조각 주는 차보살의 인정까지 받으니 흐뭇했다. 이것이 바로 천불선원의 부처님 중 한 분이 건네는 가피가 아니겠는가.


차맛은 물맛이다
물맛은 산맛이다
황악산 산향 깃든 자비한 천불 도량
산맛에 불향이 퍼져
다향마저 자비하다
사랑은 차맛이다
사람은 산향이다
가을이 깊어갈 때 인연 두루 깊어지면
다향에 산맛이 깃들어
사랑마저 자비롭다
- <산중다원에서 그대와 차를 마시면> -


시간은 머뭇거리는 순간까지 헤아려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 그리고 숨을 쉬는 순간을 아끼며 인연조화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직지사 가을 도량은 흙담에 정감이 느껴진다. 흙담에 소박한 꽃들이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있지만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에 그 존재가 결코 미미하지 않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결코 미미하지 않은 존재,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는 지혜라는 것을 내게 온 가을 속에서 얻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