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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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眼目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뉴욕 원각사 주지스님이 몇 년 만에 한국에 왔습니다. 대만 사찰을 방문하려고 함께 불광산사佛光山寺, 원조사圓照寺, 묘숭사妙崇寺, 제원사諦願寺를 방문하고 성운대사님도 친견하며 보리심菩提心으로 내 생활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늘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함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리심과 바라밀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보리심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 보리심을 실천하는 보살菩薩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서원을 세우고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 바라밀波羅蜜을 실천하면서 보리심을 싹틔우고 바라밀을 꽃피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바라밀다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의 52위五十二位 지위점차地位漸次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보리심은 바라밀을 실천하여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대만 사찰을 탐방하며 주지스님들과 나누던 마음은 포교와 불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게 하였던 일들이 얼마나 작은 일이었는가를 보게 합니다.
스님들이 그 큰 불사를 회향하는 길목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도하며 실천했다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로 발심하게 하였습니다.
불광산사의 성운대사님은 연세가 95세이셔서 분주함을 드리지 않으려고 친견하지 않고 그냥 오려고 하였는데, 저녁시간에 숙소로 부르셔서 다녀왔습니다.
큰스님은 노환老患으로 시봉스님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 하는데도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지난날의 이런저런 말씀 속에 깊은 인연들을 주셨습니다.
성운대사님 친견의 인연은 마치 2,600년 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쿠시나가라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스스로도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불자들과 더 가까이 지내야겠다는 서원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삼십여 년 전, 구룡사에서 백고좌법회를 마치고 통도사 월하 노스님 곁에서 며칠간 지내다가 동지법회를 하기 위해 정변전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감기를 앓고 계셔서 날씨가 추우니 밖에 나오시지 마시라고 하였지만, 문밖 토방까지 내려오셔서 ‘잘 가라고~ 잘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스님, 감기 드셨으니 나오시면 안 됩니다~’ 노스님께서는 ‘여기까지 오신 이도 있는데~’ 하십니다. 그리고 동짓날 꼭두새벽에 전화하셔서 ‘정우가~~~’ ‘예~~~’ ‘잘 올라갔나?’ ‘예~~~’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월하 노스님의 그 자상하신 가르침을 어디에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노스님의 인자하신 가르침과 성운대사님의 연민심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처음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뵙고 수많은 선지식을 참방하다가…… 덕생동자徳生童子와 유덕동녀有徳童女를 만나고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참방 한 뒤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선재동자는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출발하고자 했던 초발심初發心을 염원하여 봅니다.
시계의 초침이나 분침이 360도 돌고 있지만, 다시 돌아와 제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지만, 출발과 끝은 같은 곳이 아닌 것을 우리들은 상기해 봐야 합니다.


『화엄경華嚴經』 「초발심공덕품初.心功.品」에 보면 제석천왕帝釈天王이 법혜보살法慧菩薩에게 묻습니다.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내면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자 법혜보살이 대답합니다.


“불자여, 이 이치가 깊고 깊어서 말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그러나 내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말 하리라.”


초발심의 그 공덕功德은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입니다. 복은 짓는 것입니다. 덕은 나누는 것입니다. 지혜는 닦는 것입니다. 유루복덕有漏福德이 무루복덕無漏福德으로 바뀌면 공덕이 됩니다. 공덕은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자리입니다.


샘물을 떠올려도 끊임없이 물이 샘솟는 것처럼 공덕은 부증불감한 자리입니다.


“불자여, 또 이 비유는 그만두고, 가령 어떤 사람이 한 생각 동안에 동방의 무수한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방편을 알며, 이렇게 모두 말하여 열째 사람에게 이르렀고, 남방, 서방, 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 하방도 역시 이와 같았느니라.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은 보살이 처음 발심한 공덕에 견주어 보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이렇게 억분의 일, 백억 분의 일, 천억 분, 백천억 분, 나유타 억분, 백 나유타 억분, 천 나유타 억분, 백 천 나유타 억분, 수분.分, 가라 분, 산수 분, 비유 분, 우파니 사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보리심을 가지고 처음 발심한 공덕에 비하면 그 공덕은 비교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자여, 이 비유는 차치하고, 가령 어떤 사람이 온갖 즐길 거리로써 시방의 열 아승지 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백 겁 동안 공양하고, 그런 뒤에 가르쳐서 십선도十善道를 닦게 하고, 이렇게 천 겁 동안 공양한 뒤에 4선四禪에 머물게 하고, 백 천겁을 지낸 뒤에 4무량심四無量心에 머물게 하고, 억 겁을 지낸 뒤에 4무색정四無色定에 머물게 하고, 백억 겁을 지낸 뒤에 수다원과에 머물게 하고, 천억 겁을 지낸 뒤에 사다함과에 머물게 하고, 백 천억 겁을 지낸 뒤에 아나함과에 머물게 하고, 나유타 억 겁을 지낸 뒤에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고, 백 천 나유타 억 겁을 지낸 뒤에 가르쳐서 벽지불도에 머물게 하였다면, 불자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의 공덕이 많다고 하겠는가.”


여래如來의 종성種姓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초발심을 했고 보리심을 한결같이 지니고 그 보리심이 방편이 되어서 팔만장교도 설하셨고 수없는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나투게 되었다는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부처님 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생을 위하는 일입니다.
중생을 위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홍서원을 통해서 여래의 종성, 보리심의 종성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초발심을 통해서 보리심을 증장하고 선근장양善根長養해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바라밀다波羅蜜多로 이루신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경계가 모든 중생에게 평등함을 알게 한 연고로 보리심을 냈다는 것입니다. 대만 불교를 순례하고 성운대사를 만난 뒤 월하 노스님을 생각하면서 뉴욕 원각사 불사를 비롯한 또 다른 불사에 대한 원력을 초발심으로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본래 우리 모두는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잃어버린 이가 범부중생입니다. 그러니 부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수행정진입니다. 보리심으로 여래의 종성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바라밀다를 실천해서 드러난 현상이 무상정등정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속에 보리菩提는 의미 있는 생활이요, 더불어 사는 인생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화엄경』 「십행품」에서 이르셨습니다.


“이 중생들은 내 복밭이고 나의 선지식이다. 내가 찾아 나서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몸소 찾아와서 나를 바른 선법에 들게 하는구나.
나는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 한 중생의 마음도 어기지 않으리라.
내 보시를 받은 중생들은 모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 평등한 지혜를 가지며 바른 법을 갖추어 널리 선행을 하다가 마침내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에 들어 지이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 이것이 보살의 즐거운 행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