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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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 휴정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①


조선시대 불교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라 할지라도 서산대사로 알려진 청허 휴정과 제자 사명 유정은 알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했던 구국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과 소외만으로 각인된 결과이다. 세간은 그 이상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왕은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선조는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를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휴정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은 문도 1,500명의 의승義僧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휴정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한양을 수복하고 나서 선조가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때 휴정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위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선조에게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선조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이상의 사실이 휴정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조선의 하늘과 땅에서 불교와 스님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당시 불교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기여했다고 해서 조정과 신료들이 스님들에게 예전과 다른 좋은 대우를 해준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인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것이 휴정이 조선불교에 끼친 첫 번째 공적이라 할만하다.


휴정은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고을 수령이 그를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成均館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급수귀래홀회수 靑山無數白雲中청산무수백운중)’라고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출가하고 경성 일선(敬聖一禪, 1488~1568)에게서 수계受戒하였으니, 이때가 1540년(중종 35), 나이 21세 되던 해였다. 그 후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2)을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리고 7, 8년 동안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고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다.
장유張維가 찬술한 비문에 의하면 휴정은 “영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사명 유정四溟惟政·편양 언기鞭羊彦機·소요 태능逍遙太能·정관 일선靜觀一禪·현빈 인영玄賓印英·완당 원준阮堂圓俊·중관 해안中觀海眼·청매 인오靑梅印悟·기암 법견寄巖法堅·제월 경헌霽月敬軒·기허 영규騎虛靈圭·뇌묵 처영雷默處英·의엄義嚴 등은 휴정의 제자 가운데 특히 유명하였으며, 유정·언기·태능·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휴정의 문하가 조선의 하늘을 드리운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폐허가 된 조선의 불교가 다시 일어선 것이다. 법통과 법맥이 확립되었고, 수행전통이 옛것을 면면히 계승하게 되었다. 특히 편양 언기는 우선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조선불교의 임제종臨濟宗 해동초조海東初祖로 선언하였다. 이것은 고려 말부터 수립된 나옹懶翁 중심의 법통을 부정하여 당시에도 논란의 여지가 많았지만, 스승 휴정의 선사상과 임제종 법통에 대한 언급은 편양이 태고법통을 수립하는 결정적 기초가 되었다. 이른바 편양은 휴정의 비문과 『청허집』의 서문을 다시 찬술하여 태고법통을 당시 불교계에 확고하게 선언하였다. 이것이 휴정이 조선불교에 끼친 두 번째 공적이다.


휴정의 저술은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각각 한 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어 있다. 그는 『선가귀감』에서 “세존世尊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부처님께서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세 곳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多子塔前다자탑전 分半座분반좌)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靈山會上영산회상 擧拈花거염화)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밖으로 내보이심(沙羅雙樹사라쌍수 示雙趺시쌍부)이 셋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선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여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이 선지禪旨의 근원임을 밝혔다.


휴정은 자신이 살았던 동시대 불교계의 수행풍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오늘날 선禪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하고, 오늘날 교敎를 하는 사람들이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하니, 한 법을 놓고 서로 옳고 그르다고 하며 한 마디의 말을 가리키며 서로 다투는 격이다.
휴정이 제자 사명당에게 보인 글이다. 당시 불교계가 선교학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휴정은 당시 수행자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부처의 마음과 말씀이 다르지 않지만, 수행자들은 둘로 본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눌 수 없는 불이不二의 한 법法을 놓고 옳고 그름을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과 교를 구분하고 서로 우위를 다투었던 것은 불교계의 오랜 병폐였다. 불교가
밖으로 탄압과 소외를 받고 있었던 형국에서도 그들의 고집과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때문에 휴정이 주장했던 것은 선과 교의 근원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휴정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굳이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 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안다고 하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주장하여 가련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휴정은 구체적으로 교학자敎學者들이 “교敎 가운데 선禪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문승聲聞乘도 아니고 연각승緣覺乘도 아니고, 보살승菩薩乘도 아니며, 불승佛乘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가禪家 입문의 초구初句일뿐 선지禪旨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이른바 선주교종禪主敎從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비록 선과 교가 일치하지만, 마음은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휴정의 이와 같은 인식은 이후 조선불교계를 뒤덮었다. 이것이 휴정이 조선불교계에 끼친 세 번째 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