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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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근善根을 심는 불자佛子 부처님 제자임을 기뻐하라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정월 보름날 해뜨기 전, 집집마다 다니면서 오곡밥을 얻고 길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내 더위 네 더위’라고 소리치며 한 여름날 더위를 피해 보려고 했던 아이들은 석양夕陽 무렵이면, 깡통에 불을 지펴 쥐불놀이로 한바탕 굿판을 벌였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정월 대보름날도 영험이 없게 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에어컨에 선풍기가 있어서 더위를 피할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어릴 적 추억의 동심童心일뿐, 정서적인 것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찰에서도 삼동결제三冬結制를 회향廻向하는 날입니다. 결제結制는 맺는다는 것이고, 해제解制는 푼다는 것인데, 무엇이 있어 따로 묶고 무엇이 있어 따로 풀 것이 있겠습니까?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스님은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성북동에 북향집을 짓고 심우장 尋牛莊이라 하였습니다. 심우장이란 소를 찾는다는 집입니다. 만해 스님은 별호別號를 목부牧夫라 하셨으니 소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통도사의 경봉 스님께서는 만해 스님께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심우장이라 하면 소를 찾는다는 것인데, 만해 선사여. 어찌하여 목부라 하셨습니까? 소를 찾으십니까? 소를 키우십니까?󰡓
법 거량으로 보여 집니다. 이에 만해 스님은 경봉스님께 답을 보내십니다.
“… 늙은이가 할일이 없어서 번잡을 떨었으니 차茶나 한잔 드시오.”
참 멋지고 여유로운 선사禪師의 경계를 보이셨다고 생각 됩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요,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입니다.
삼일수심의 지극한 마음은 천년을 덮고도 남을 보배로움인데, 백년을 탐했던 물건은 아침녘 햇살에 비치는 분진 같은 허상의 그림자입니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라서 좋고, 우수 경칩은 대동강 물도 녹인다는 봄기운이 만연해서 좋고, 삼동결제를 마치고 자유로움을 찾아,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을 떠나는 수행자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지금쯤이면 삼동결제 대중들은 해제를 하고 적적寂寂한 산사山寺의 비탈진 길을 걸어가는, 걸망 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출가자들이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머리를 기르는 것. 둘째, 손톱을 길게 기르는 것. 셋째,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는 것. 넷째,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 다섯째,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에 보면, 『진리를 향해서 정진하는 삶이란,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불교에 입문入門하려고 초발심初發心을 내는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사람들의 허물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불보살님의 도량道場이야 곳곳에 있지만, 통도사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요 적멸보궁寂滅寶宮 입니다. 그런 통도사에서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어찌 구룡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으며, 구룡사에서 회향의 열매를 씨앗으로 심지 않았다면 어떻게 일산에 여래사 같은 절이 창건될 수 있었겠습니까? 신도시의 포교당도, 해외 포교당도 또한 그러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하는 것이요, 둘째는 상대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며, 셋째는 모르는 이에게 가르쳐주기 위한 일입니다. 수행 정진도, 시주와 보시도, 법공양의 보살행도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씨앗을 심고 가꾸면 행복幸福이라는 열매를 맺고 부정적인 씨앗을 놓아두면 불행不幸이라는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불행도 심전心田의 마음 밭에 있는 것을 보면, 논에 있는 벼와 공생共生하는 잡초인 피와 비슷해 보입니다.
농사철이면 농부들이 논에서 잡초를 뽑아내는 것을 봅니다. 잡초인 피는 살아남으려고 변이현상으로 논에 모내기를 할 때부터 벼와 비슷하게 자라고 있으니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것을 찾아내 뽑아버립니다. 그렇게 피사리를 하다보면, 피는 벼보다 뿌리는 견고하고 줄기가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봅니다. 색깔은 벼보다 더 진한 녹색을 띠고 윤기가 납니다.
허상虛想에 젖어있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농사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논에서 잡초를 방치하다가 벼이삭이 익어서 고개를 숙일 때 쯤이면, 햇볕을 더 받으려고 벼보다 한 뼘은 더 커 있습니다. 가을 들녘의 논畓은 피 반 벼 반입니다. 그러니 농부들의 피사리는 벼이삭이 익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그러나 논에서는 벼보다 먼저 익은 씨앗들을 논바닥에 떨어트리고 그 다음해에도 다시 잡초가 되어 자라게 됩니다. 그냥 볍씨와 함께 탈곡을 하면 벼 속에 섞여 있다가 못자리에서부터 끊임없이 반복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난초 밭에 잡초처럼,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번뇌 망상도 그렇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있어 지혜의 변별력으로 솎아낼 것이며, 누가 있어 지혜롭게 잘라 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지혜 있는 삶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게을러지면 안 됩니다. 게으른 이가 지니는 허물은 허상虛像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입니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이 부족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출가자가 게으르면 생사生死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여래사 가는 길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강의 얼음이 녹았네. 봄이 오고 있구나. 엊그제 미소년이었던 나는, 벌써 60갑자甲子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는 임진년壬辰年을 만날 수 없겠지. 계사년癸巳年도 하루하루 가고 있으니 지나간 시간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순간순간들은 소중한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곧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언제 떠날지 알 수도 없는 불안전한 세상, 스스럼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음지陰地에 잔설殘雪처럼 내 몸과 마음속에 남아 있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의 찌꺼기는 덜어내야 합니다. 여한 없는 인생의 남은 시간들, 소중히 다루어 가는 것이 수행이요 정진입니다. 승가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좋은 일은 수행정진修行精進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집에 있는 이가 열심히 살면 의식意識이 넉넉해지고 과한 욕심慾心 부리지 않으면 풍족豊足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
의식이 풍족해진다는 것은 자족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분수에 맞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설마 그럴까?’ 말 할 수 있겠지만, 오탁악세五濁惡世는 중생衆生들에게 욕구慾求 욕망慾望 욕심慾心이 다함이 없는 세상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이가 수행을 잘한다면 깨달음은 반듯이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승가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에게 묻습니다.
『거룩한 이여! 저는 이미 보리심菩提心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보살이 어떻게 보살의 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의 행을 닦으며, 어떻게 해야 보현행원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2천6백 여 년 전,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때쯤, 인도의 혁신파 사상계思想界는 범아일여 사상이 주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범梵’은 브라흐만의 신神이고, ‘나我’는 자아(自我, 아트만)입니다.
인도의 사상계는 신神과 인간人間이 다르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범梵자는 수풀 림林에 무릇 범凡자의 합성어合成語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神입니다. 범신凡神이며 창조신創造神입니다. 유일신唯一神이며 다신多神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신神과 자아自我는 둘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삼법인三法印에서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과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과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제법무아는 상일성常一性과 주재성主宰性이 결여되었으므로 자아自我는 무아無我라 하신 것입니다.
참나眞我를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는 항상한 자리를 법신法身이라 하였으며, 기쁘고 즐거운 자리는 열반涅槃입니다. 참나의 자리는 부처(佛)이며, 청정하고 깨끗한 자리를 법法이라 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풍선 안에 담겨져 있는 자아自我의 세계와 풍선 밖에 있는 우주라는 허공의 세계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종교에서는 오직 그분만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하셨지, 그 누구도 사후死後에는 인간 세상에 다시는 태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만, 사후세계를 천당과 지옥으로 분별해서 말할 뿐입니다.
불교는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금생에 잘 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힘들고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해제하는 날, 인생의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보듯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휠체어 타고 가는 것 보다는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 있는 나를 보았으면 합니다. 지팡이 짚고 걷는 걸음보다는 무릎이 좀 힘들더라도 걸을 수 있을 때 더 걸어 보자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는 다반사茶飯事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생生, 노老, 병病, 사死도 그렇습니다.
보리심菩提心은 선근장양善根長養입니다. 우리들이 선근을 심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 삼보리심도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삶이 불보살님의 경계가 아니겠습니까?
“소를 찾는다는 것은 소를 잃어 버렸다는 것이요, 소를 키운다는 것은 소 찾을 일이 없다”는 것인데, 만해 선사는 마치 오른 손으로는 소를 찾는다 하고 왼손으로는 소를 키운다고 하신 격이니 그건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정을 부정하면 대 긍정이 드러나는 도리가 여기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사禪師의 멋드러진 언전소식言前消息입니다.
시간은 연속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 길 떠난 이여! 운수행각의 걸망진 이들이여! 부처님 제자임을 기뻐하라.


E-mail : asanjungwoo@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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