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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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리심發菩提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입니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부처님의 팔만장교八萬藏敎와 실천해야 할 계율戒律, 조사祖師 스님들의 논장論藏, 그래서 불교를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인천교人天敎, 소승교小乘敎, 대승교大乘敎, 돈교頓敎, 원교圓敎로 말합니다.
선가禪家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하기도 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하기도 하며, 점진적으로 깨달아가는 점오점수漸悟漸修를 말하기도 합니다.
삼십여 년 전, 선원에서는 이 법에 대해서 설왕설래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통도사 방장이셨던 월하 노스님께서는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돈오돈수가 어디 있고, 점오점수가 어디 있느냐. 공부를 서두르는 이에게는 점오점수로 늦추게 하고, 게으른 이에게는 돈오돈수로 공부하도록 할 뿐이지, 그 자체에 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가르침에 “예! 스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은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참,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위대한 삶을 살지 않아도 자유로움을 지니고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는 절대로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유란, 지나치면 방종입니다. 참 자유는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걸림이 없는 삶입니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비춰보면 모두가 고독하다고 합니다.
그 고독함을 인생팔고人生八苦에 비춰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혼자입니다. 또 죽을 때도 혼자이며, 괴로움도 혼자이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는 길도 혼자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엊그제가 청년이었는데, 어느덧 초로初老의 인생에 와 있습니다.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삶이란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인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으며, 연기緣起하는 인연법因緣法을 통해서,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의 가르침으로 성인聖人의 도를 진지하게 닦아가게 하는 생활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근간에 의미 있게 보았던 인도印度의 영화가 두 편이 있습니다.
‘지상에서 별처럼’, ‘별에서 온 얼간이’입니다.
‘별에서 온 얼간이’는 종교에 대한 내용을 심하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종교인들이 종교를 내세워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일들을 들여다보게 하고, 속고 속이면서도 속고 속이는 줄도 모르고 사는 이들이 다반사로 겪고 있는 일들을 객관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시각에서 가까이 바라보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백을 남겨준 작품이었습니다.
“종교는 비유를 통해서만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법은 온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비슷한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났던 상황들을 이 세계에 일어났던 비슷한 상황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문자는 몇 줄 안 되는 시詩로 쓰고 사원의 이야기라 하며, 시간이라 할 적에는 시時는 날일日 변에 절(寺)의 하루라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시詩와 시간時間의 표시를 뜻글인 한문이 얼마나 명쾌하게 표현했습니까.


“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났던 상황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부적절하나마 언어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언제나 저 다른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부적절한 말일지라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말을 통한 이 비유의 방법 이외에는 저 다른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고 인도의 철학자 ‘샹카라’는 말하였습니다
‘별에서 온 얼간이’는 신神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힌두교 사원에 갈 때 가지고 갔던 공양물을 성당에 가지고 갔다가, 미사 보던 대중들이 기겁을 합니다. 또 이슬람 사원에 기도하러 가는데 공양물을 성당에서 사용하는 포도주를 들고 갔다가 사원에서 곤욕을 겪으며 도망쳐 나오는 상황들을 눈 여겨 보게 됩니다. 


80년대 초, 석지현 스님과 무용가 홍신자 공동번역서 ‘마하 무드라의 노래’
“시詩여 그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어렵다.
시詩여 그대의 길은 이미지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거기 어떤 마찰도 없다. 과학이여 그대는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대의 길은 이미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경험적 사실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시詩여 그대의 길은 쉽다. 시詩여 그대는 오직 시詩일뿐이다.
그것으로써 그대는 끝이다. 시詩 그것은 이미지다.
이미지는 아름답다. 이미지 속에서 시인詩人이여 마음껏 취하라.
그러나 이미지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렇다면 종교宗敎란 무엇인가?
종교는 궁극의 시詩다. 그것은 이미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험적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과학이란 너무나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철학이란 너무도 주관적이므로……
과학과 철학, 철학과 과학, 이 양자를 모두 사용해야 한다.
이 둘을 다리(가교)로써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시인詩人의 방법이다. 모든 종교는 최후의 시詩다.
아니 시詩의 본질本質이다.
그대는 붓다(부처님)보다 더 위대했던 시인詩人은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붓다는 한 줄의 시詩도 쓰려고 노력한 일조차 없었다.
나는 여기 그대와 함께 있다. 나는 시인詩人이다.
나는 한 줄의 시詩도 짓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 한다.
나는 과학과 철학이 만든 간격의 다리를 놓으려 한다.
나는 그대에게 차별이 없는 전체의 느낌을 주려고 한다.
과학은 절반이다. 철학 역시 반쪽이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그대에게 전체의 느낌을 주지 못한다.
철학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샹카라의 말이 실감난다.
이 세계는 환영幻影이다. 이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 세계를 느끼는 그대의 의식意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샹카라의 이 말은 너무 주관에 치우친 말이다.
만일 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럴수록 마르크스 쪽으로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두 입장을 넘어서 전체를 이야기 하자.
시적詩的인 비유를 통해서 언어로써 공空을 설명하지만,
공空은 결코 언어 따위로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유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마하 무드라의 노래 ㅡ인도의 성자 라즈니쉬ㅡ)


『대보적경大寶積經』에
마음은 바람과 같다.
마음은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마음은 머무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는 이내 곧 사라져버린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일어나 앉아라. 그대들에게 잠은 무슨 이익이 있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 받는 이에게 잠이 왠 말인가.
일어나 앉아라.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일념一念으로 배우고 실천하라.
신심과 원력과 정진력으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고 밖으로만 구하려는 마음이 고통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들이니, 발보리심發菩提心으로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실천하는 불자의 길을 우리는 진지하게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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