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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조 도의조사 구법기념비 제막 현장을 가다 |
홍진호 불교TV 보도부 PD 지난 4월 11일 조계종조 도의조사 구법기념비 제막식 취재를 위해 하루 전날인 10일 인천 공항을 출발했다. 2박 3일간의 짧은 해외 출장길이었지만, 행사의 의의만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조계종에선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비롯해, 중앙종회의장 자승스님과 호계원장 법등스님, 포교원장 혜총스님 등이 참석해 종단 주요 교역직 스님들 중 절반이 중국에 와 있는 듯 했다. 행사 당일인 4월 11일엔 불행히도 비가 내렸다. 예상치 못한 봄비 탓에 제막천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무려 1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중국 남창 우민사 현지에 세워진 조계종조 도의조사 구법기념비의 의의만큼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도도하게 받아치기에 충분했다.
‘도의조사 구법기념비’의 높이는 5.5m, 전국 각지의 빼어난 원석들을 모으고 다듬어 7개 월간의 작업 기간을 거쳐 완성 됐다. 구법기념비에 새겨진 글자는 종조의 행장과 구법여정이 담긴 모두 4718자.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직접 글을 지었고, 김세호 씨가 글씨를 썼으며, 김경기 씨가 비문에 새겼다. 지난해‘합의서’체결 이후 1년여 동안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직접‘진행 과정’을 일일이 체크했다고 한다.
조계종조 도의조사는 구법을 위해 건중 5년 784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홍주 개원사 즉‘구법비’가 건립된 현재의 남창 우민사에서‘서당지장선사’를 친견하고 법을 받게 된다. 당시 지장선사는“나의 법통을 전수받을 자, 그대가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라고 찬탄하며 전법계와 함께 도의라는 법호를 내렸다. 특히 마조대사의 법맥을 이은‘서당지장선사’는 도의조사 외에 혜철선사 등 소위 쟁쟁한 신라제자를 둬, 곧 강서의‘마조선맥’이 국내에서‘구산선문’을 이뤘으며 이중‘가지산문’이 오늘날‘조계종’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821년 귀국해 조계선법을 펼치려 했던 도의조사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에선 북종선과 교종 등이 폭넓게 받아들여져 공존했으나, ‘금강경’을‘소의경전’으로 즉각적인‘깨달음’을 추구하는‘남종선’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도의조사는 쫓겨 가다시피 해 겨우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 주석하며,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았음을 탄식했다. 소위 그 당시 원류에서 인정받고 돌아왔으나, 국내에선 찬밥신세, 그저 제자양성에 몰두하다 ‘입적’에 든 것이다. 5조 홍인에서 6조 혜능으로 넘어가는 중국 선종사의 가장 큰 갈등구조와 하이라이트를 감안 한다면, 도의조사의 고초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중국내에서도 남종선으로 선맥이 흘러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 곡절이 있었던가. 하여간 지장선사는 마땅한 중국제자는 두지 못했다. 곧 그 법맥이 중국에서 현창되지 못한 것이다. 오죽하면 백장선사가“강서선맥이 송두리째 동국승에게로 귀속되었다.”고 찬탄하였겠는가. 지난 11일 제막된‘도의조사 구법기념비’는‘초조 달마대사’와‘6조 혜능대사’를 거친 선맥이 면면히 이어져‘동방’에 현창되었음을 알리는‘표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화혁명을 겪으며, 이제‘원류’에서 사라져버린 중국 불교의‘수행풍토’와‘전통’. 도의 조사 당시 신라의 스님들이 구법을 위해 중국 땅을 밟았다면, 이젠 잊혀져버린 원류의 선을 되살리고자 다시 그 후손들이 중국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먼 훗날 중국의 스님들이 스승의 출가지를 되돌아보고자 한국을 찾아,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 등 국내 유수한 사찰에 앞 다퉈 구법기념비를 지을 날을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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