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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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하고 까칠한 시대의 종교적 아량

최윤필
한국일보기자


‘까칠남’이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한다. 까칠남이란 겉으론 불퉁하고 차가운 듯 하지만 알고 보면 웅숭깊은, 다시 말해 행동은 푸석푸석하고 까칠해도 속마음은 촉촉하고 자상한 그런 남자라는 의미다. 꽃미남이나 바람둥이, 서양 사람들이‘스위티하다’고할때 연상되는 것과 상반되는 이미지, 요컨대 터프가이의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보 면 무방할 듯싶다.


그런데 이런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보니 새로운 듯하지만, 고래로 그런 남자가(혹은 이성 이) 상대방에게 어필하지 않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고전적인 화법으로 까칠남은 교언영색 하지 않는 인간, 인기나 평가에 영합하지 않는 인간, 우직하고 성실한 인간의 의미일 테니 까. 좋은 것은 늘 좋은 것이어서, 유행 따라 더 주목 받고 덜 주목 받는 경우는 있어도 그 본 질가치(교환가치가 아니라)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니까. 가령, 여자친구의 생일조차 아는 지 모르는지 내색조차 않던 남자가 무덤덤한 척, 아니 약간은 쑥스러운 듯 불쑥 내미는 자그 마한 선물은 일상의 각질을 깨고 습관이라는 관성의 힘을 벗어나게 하는 감동이 있다. 물론 세상이 세상이니만큼, 감동의 크기는 그 선물의 물질적 가치에 영향을 받겠지만 그것이 본 질은 아닐 것이다.

디자인에는‘후(後)감동’이라는 게 있다. 덤덤하고 우직하게 실용적 가치에 충실한 듯 보 이지만 깊은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드러나는 미적 요소, 혹은 반대로 얼핏 보기에 예쁘기만 하지 어딘지 부실한 듯 보이는 가구에서 그 부실한 지점들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눈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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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조차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나 이렇게 잘 나고 멋진 학생입니다’하는, 소위
이력과 사양을 과시하듯 가슴에 달고 살아야 손해보지 않는 시대다. 그것이 어쩌면 모든 것
이 상품으로 존재하면서, 교환가치로 치환되고, 상징가치로 평가 받는 시대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이 척박하고 까칠한 시대에, 까칠남이 평가 받고, 후감동이 디자인의 한 가치로 대
접받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알쏭달쏭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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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않는 지지구조를 발견하게 될 때의 믿음직스러움 같은 것이다. 예컨대 아무 무늬 없이 밋밋한 책상의 상판을 물끄러미 응시할 때 언뜻언뜻 드러나는 나무의 은은한 무늬결, 혹은 무질서하게 배치된 듯 보이는 결의 방향들이 지닌좀더높은 차원에서의 질서가 주는 감동 은, 마치 우연히 찾아낸 비경을 혼자 간직하면서 남몰래 미소 짓곤 하는 오지여행자의 자족 감처럼 우리의 마음을 부풀게 한다.


처음에는 낯설던‘자기PR(자기과시) 시대’라는 말이 진부한 상식이 된 지도 수십 년은 지 난 것 같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직 원서라는 걸 쓰면서‘자기 소개서’를 처음 작성할 때 느꼈던 당혹감, 혹은 어학능력 자기 평가서에 영어능력‘상·중·하’의 어디에 체크할지를 두고 혼자 낯붉혀가며 고심하던 때의 순정(?)도, 마치 어색하기만 했던 풋사랑의 추억처럼 이제는 우스워하며 회고하는 나이가 됐다. 코밑에 솜털도 나지 않은 중학생조차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나 이렇게 잘 나고 멋진 학생입니다’하는, 소위 이력(career)과 사양 (specification)을 과시하듯 가슴에 달고 살아야 손해보지 않는 시대다. 그것이 어쩌면 모 든 것이(심지어 생명조차) 상품으로 존재하면서, 교환가치로 치환되고, 상징가치로 평가 받 는 시대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이 척박하고 까칠한 시대에, 까칠남이 평가 받고, 후감동이 디자인의 한 가치로 대접받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나 당연하다 고 해야 할지 알쏭달쏭해진다.


이런 단상들을 끼적거리는 동안 내 마음 한 귀퉁이에 어룽거리는 몇 컷의 흑백 사진이 있 다. 굳이 누구의 것이랄 것 없이 떠오르는 소박한 나무 발우 한 벌. 누덕누덕 기운 가사 한 벌. 닳고 닳은 구두 한 벌. 혹은 누군가 어릴 적 끼고 산 듯 작고 낡은, 실밥 터진 곰 인형 하나. 그 속에 담긴 숱한 생애의 이야기와, 그 생애들이 떠받쳐왔을 생의 가치와 지향들이, 너무 아득해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듯한 시간 속의 추억처럼 새삼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법정 스님을 뵌 적이 없다. 내가 종교담당 기자가 됐을 때, 스님은 몸져누운 뒤여서 뵐 수가 없었고, 두어 차례 수소문을 한 적은 있으나 강원도 어디 산막에 계신다거나 제주도 어디서 요양 중이시라는 말만 풍문처럼 들을 수 있었다. 대신 이런저런 스님에 얽힌 이야깃 거리들은 주워들었던 것 같다. 스님이 길상사에서 왕성히 주석하실 때 부유한 신도들이 타 고 다니는 큰 차를 보면 그렇게 늘 면전에서 타박을 하셨는데, 그런 신도들은 이후 법회 때 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차를 절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다 감춰두고 오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스님은 부(富)를 타박한 게 아니라, 부의 지나친 과시를 타박했을 것이고, 나누지 않는 부의 타락을 꾸짖었을 것이다.


달포쯤 전에 내게 낯선 이메일 한 통이 왔다. 한국 사회에서 크게 행세하는 한 교회의 당 회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발신자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그릇됨과 목회자들의 비뚜름한 행태를 A4 용지 4장에 걸쳐 작은 활자로 낱낱이 적었다. 그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목사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걸핏하면 고급 음식점으로 가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모이는 것은 본분을 망각하고 분수를 어기는 짓입니다. 우리 교회가 목사에게 지급하는 급 여의 액수와 소위 목회활동비라고 하여 불법 비자금처럼 사용하고 있는 금액과 기타 무료로 제공되는 주거비 등을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밖으로 나다니며 받는 봉투는 몇 개나 되 는지도 공개해야 합니다. (…) 신체적인 장애도 없는 건강한 젊은 목사가 운전기사를 두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도록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부모형제자매가 모여 있는 교회 마당 에 머슴(목회자)이 승용차를 몰고 들어오는 행위는 참으로 오만방자한 것입니다. (…) 옳은 일인 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읊조리고 다니는 목사가 정작 자기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니 교회와 기독교까지 욕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목사와 위선자는 같은 뜻이 됩니다. 타 락한 교회의 추한 모습입니다.”


적다 보니 절을 높이고 교회를 낮춘 것 같아 불편하지만, 두 종교의 어떤 현실이 크게 다 르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 목회자 중에는 정말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낮은 곳에 임하고자 하는 참 목회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고, 스님 중에도 저 기독교인이 꾸짖은 목회자보다 더 독 직(瀆職)하는 스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신을 받들고, 절대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이지만 결국 오욕칠정의 인간이기에 모두가 가지런하게 욕망을 제어하기는 힘든 게 엄연한 존재의 한계 일 것이다. 또 그 더러움조차 틀 안에서 끊임없이 정화할 수 있는 힘,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 들의 손가락질은 받더라도 그 손가락질이 종교의 본질에까지 미치지 않도록 가치를 지키는 오욕칠정의 인간이기에 모두가 가지런하게 욕망을 제어하기는 힘들다 할지라도 그 더러움 조차 틀 안에서 끊임없이 정화할 수 있는 힘,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받더라 도 그 손가락질이 종교의 본질에까지 미치지 않도록 가치를 지키는 힘이 무릇 종교의 힘이 요, 본질일 것이다. 호수의 표면이 바람한점없는날에도 찰랑찰랑 일렁이며 현존하듯, 어 차피 인간의 욕망은 찰나의 순간조차 거울처럼 미끈할 수 없을 것이기에. 힘이 무릇 종교의 힘이요, 본질일 것이다. 호수의 표면이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찰랑찰랑 일렁이며 현존하듯, 어차피 인간의 욕망은 찰나의 순간조차 거울처럼 미끈할 수 없을 것이 기에.
이런저런 말들로 안팎의 소란이 끊이지 않아 조계종단의 근황은 그리 편치 않아 보인다.
게다가 아직 크게 이슈화하지는 않았지만, ‘승려 사유재산의 종단 출연에 관한 령’을두고 도 속말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는 한 마디로 스님이 입적한 뒤 그 재산을 종단에 귀속시 키자는 종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현행 민법상 스님이 입적하면 속가의 친족이 상속권을 행 사하며, 문도나 종단은 그 권한의 행사에 개입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해서 차제에 구족계를 받을 때나 분한신고(10년 주기의 승적 변동 확인) 때, 그리고 주지로 임명될 때나 각급 승가 고시에 응시할 때 사유재산을 종단에 출연한다는 유언장과 증여계약서를 의무적으로 작성토 록 하자는 게 종단의 뜻이라 한다. 반면에 이에 반발하는 측의 표나는 주장은, 먼저 출가· 수행의 선택이 자의인데 제도로써 그 뜻을 강요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 하 나요, 스님들이 재산에 마음을 두는 것은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인 만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우선돼야 한다는 게 둘이다. 그 밖에 다양한 반대의 명분과 까닭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우선적으로는 물질.그것이 시주든 상속이든-은 합당한 소용처가 우선 분명히 밝혀져야 구함의 명분이 선다. 그것 없이 무조건‘삼보정재의 유출은 안 된다’는것은물질 우선의 세속적 지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엄연히 내 것이어도 나보다 남에게 더 소용이 있다 싶으면, 겉으로는 꾸짖는 표정을 짓더라도 아닌 척 내줄 수도 있는 게 종교의 아량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세상이 요즘 흠모한다는 까칠남·까칠녀의 풍모요, 디자인의 후감동 같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