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다경향실 ‘파드마’에서-
이서연
시인
연초록이 올라온 자리에 돋아나는 싱그러움은 변화하는 이 우주의 한 풍경에서 깨닫게 되는 생명의 신비 중에 하나다. 광릉 숲길에 스며드는 빛에 기대어 온몸을 맡기고 내 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는 우주의 율동을 감지해 본다. 연한 바람 한 줌 깊게 들여 마시고, 잠시 멈춘 뒤 다시 길게 내뿜기를 서너 번 하면서 천천히 걷다 보면 숨을 쉬고, 의식하고, 걷고 있는 순간 순간에 저절로 감동하게 된다.
우주를 돌고 온 바람 한 점이 숨 쉬고 있는 공간에 닿으면 저절로 생명력이 돋워진다. 눈에 보이는 신록의 빛이 향내음을 풍길 수 있는 건 이렇듯 작은 자연의 인연도 생명을 돕기 때문이다. 하물며 인간이 인연을 소홀히 여겨야 할까. 자신의 편의대로 인연의 의미를 만들어 해석하고 부여할 때 스스로 최상의 복을 변질시키거나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특히 가깝다고 그 가치를 소홀히 하면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여기다가 진짜로 그 인연이 끝났을 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아쉬움을 느껴봤다면 새잎이 푸르러가는 계절에 깊이 되돌아 볼 일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는 건 일체 모든 게 무상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이치라서 애착은 끊어야 하지만 인연은 진심으로 가꾸어야 한다. 마음으로 인연 하나 짓고 그 인연 가꾸고자 보듬는 마음으로 등불 하나 켜는 날, 잠시 봉선사 방적당에 앉으니 한 점 바람에 얹혀 있는 구름조각 조차 도량에서 참선에 들고 있는 느낌이다.
 
마땅한 자리 하나
얻고픈 구름조각
운악산 산결따라
방적당을 쓸고 가네
연향에 젖은 적막인양
깊게 눕는
내 영혼
오월이 열리는 날이면 일체 모든 것이 내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이치를 지혜 삼아 내 안으로 부처님을 모시고자 등불을 올리는 손길이 분주해 진다. 산사에도 깊게 오래 봄향기가 이어지길 바라건만 성급하게 따라오는 듯한 여름 발자국 소리 탓인지 봉선사 경내 다경향실엔 시원한 차를 주문하는 손님들이 줄을 섰다. 정희왕후가 세조를 추모하고자 중건한 사찰이지만 운허 스님 이후 중생들이 생활 속에서 부처의 향기를 깨닫게 하는 불사에 힘을 써 온 덕에 봉선사는 비불교인들도 즐겨 찾는 사찰로 꼽힌다. 다경향실이 붐비는 건 생활 속 불교화의 자연스런 현상인 듯 하다.
메뉴판을 보면서 주문 할 때면 늘 망설이게 된다. ‘저 많은 메뉴 중에 딱 한 잔만 주문해야 하다니…’ 싶을 때 적지 않은 갈등을 한다. 때로는 이 산사에서는 이것만 마셔야 한다고 정해 놓은 것이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비구니 스님께서 직접 만들었다는 식혜를 주문했다. 사찰음식 요리법을 대중들에게 알려주는 강좌가 인기 있는 사찰 아니랄까 봐 시원한 식혜가 익숙한 어머니의 맛을 준다. 사실 일부러 산사의 향기를 가미하지 않아도 직접 만든 오미자, 유자차 등은 정감 있는 손맛을 느끼게 한다. 
다경향실에서 그 어떤 차를 주문해도 야외 테라스에서 마시면 보너스로 사철 다르게 펼쳐지는 풍경까지 담긴 차맛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사는 모습이 다르듯이 차맛을 느끼는 시점과 감성이 다르다. 마주하기만 해도 행복해 지는 사람과는 차가 특별하지 않아도 맛있다. 그냥 차가 둘 사이에 있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아련함에 가슴이 삐거덕거리거나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영혼이 철렁할 때, 하필 누군가의 어설픈 위로로 더 감정에 얽힌 경우엔 그냥 혼자라도 산사에서 차 한 잔을 풍경에 담아 마셔보는 게 스스로를 아끼고 보듬는 방법의 하나다.
만약 마음 맞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햇살이 부서지는 곳에서 두 마음을 차향에 섞어 보는 것이 어떨까. 
다경향실 야외 테라스에서 보이는 연꽃 정원 건너편에 카페 ‘파드마’가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연꽃인 ‘파드마(padma)’는 <광명진언>의 한 구절이기도 해서 이름 자체만 들어도 행복이 성장되는 듯하다. 그곳에 들어가면 캘리그라피로 쓴 내 시들과 봉선사 법일스님의 시가 전시되어 있다. 작가들은 눈으로 보는 시, 귀로만 듣는 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화전을 열곤 한다. 5년 전 어머니 49재를 마치고 도량을 나오는데 마침 꽃잎이 흩날렸다. 그때 쓴 시가 <꽃비>다. 그 시화를 보는데 카페 보살님이 작가를 위한 대접이라며 연잎차를 주셨다. 그 자비함에 감사하며 테라스에서 꽃잎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길 잃은 하루가 모처럼 눈부시다
어쩌랴, 떠남도 사랑인걸
                                    -<꽃비> 전문-
이별 앞에서는 ‘아프다’는 언어 하나만으로 감정을 대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냥 이별 그 자체를 ‘사랑’이라는 범주에 넣어두는 것도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한 방법이 된다. 꽃비는 이별을 미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승화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한번쯤 마음 나눔이 되는 사람과 꽃비내리는 날 차 한 잔 나누며 숨을 쉬어 보자. 그런 사람이 없다면 늘 동행중인 내 안의 님과 마주 하자.
   
꽃비가 그 하나로 눈부신 풍경이듯
사랑은 그 하나로 눈부신 의미로다
그대여 찻잔에 담긴 향기
내 숨처럼 마셔보라 
길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다 문득 꽃향이 퍼지는 곳을 만나면 잠시 속허물을 사루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 그것이 깨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