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법인 아름다운 동행이 지난 달(10월) 중순 서울 광화문 청계천 광장에서 ‘비움으로 행복찾기’ 캠페인 선포식을 했습니다.
사부대중이 모여 108배를 올리며 우리의 욕심과 이웃들의 아픔을 돌아보자는, 그럼으로써 삶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자는 취지의 자리였습니다. 가을로 깊어가던 청계천 물빛에 촛불들이 영롱하게 떠 흐르던 그 저녁의 청계천 광장 귀퉁이에 서서, 저는 2500년 전 ‘고타마’라는 성을 쓰던 한 젊은 왕족, 훗날 인류 구원의 깨달음을 얻고 붓다(Buddha)라고 불리게 되는 바로 그 청년을 떠올렸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 사이에 놓인 2500년이라는 긴 시간의 가닥과 매듭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삶이 있던 때를 전후한 300년, 즉 BC 6~4세기는 인류 문명사적으로는 철기시대에 해당됩니다. 인류 농업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계급이 형성되고, 더불어 고대 국가가 성립되는 것이 그 시기입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를 비롯한 인류 정신문명의 위대한 스승들-공자, 노자, 이사야, 조로아스터, 소크라테스 등(無順)-이 잇달아 등장한 때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인류 추축시대(樞軸時代) 혹은 황금축 시대라고 부른 바로 그 시기입니다. 오늘의 저 위대한 스승들은 제각기 인류 구원의 염원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신의 계시를 받들고자 일어섰습니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유사 이래 인류가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풍요 속에서 그들은 이웃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에 천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전해 오는 싯다르타의 출가 과정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듯이, 당시 하층민들의 삶은 굶주림과 질병과 헐벗음으로 참혹했다고 합니다. 어울려 수렵하고 함께 열매를 따서 생을 잇던 원시 수렵시절과는 비교되지 않는 농업혁명 이후의, 미증유의 참경(慘景)에 싯다르타를 비롯한 인류의 스승들은 먼저 자신을 비웠던 것입니다. 그 풍경은 산업혁명 이후 영국 프롤레타리아들과 소년 노동자들의 고통을 그린 찰스 디킨스의 소설 속 풍경보다 훨씬 참혹할 것입니다.
중세의 교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3대 죄악 가운데 가장 먼저 금전욕을 들었습니다.(나머지 둘은 권력욕과 색욕입니다.) 근대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꼬집었던 저 욕망들은, 더 이상 악덕이 아닙니다. 토마스 홉스(<리바이어던>)나 마키아벨리(<군주론>)를 거치며 권력욕은 면죄부를 받았고, 색욕 역시 지난 세기 프로이트 등 학자들의 여러 업적을 통해 정당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금전욕도 물론입니다. 19세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써서 금전욕의 정당성을 정초하기 훨씬 이전부터, 다시 말해 근대 상업자본주의가 발호하던 15~16세기부터 이윤 추구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미덕-영주나 국왕, 성직자 등 중세 계급이 아닌-으로 칭송됐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화 100달러 지폐에 얼굴을 남긴 벤자민 프랭클린-피뢰침을 발명하는 데 일조한 일화도 지닌- 같은 정치가가 “시간은 돈”이라는 유명한 금언을 설파한 것도 이미 300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과장해도 된다면, 모든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욕망의 유전자들로, 흔히들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 후기 자본주의의 살벌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주춧돌도 사적 소유의 자유로, 경제적 자본주의와 나란히 놓인 근대 부르주아의 정치 이데올로기입니다. 
청계천 광장의 비움 캠페인 선포식 행사에서는 어떤 분이 대형 천에 ‘비움’이라는 큰 글씨를 붓으로 쓰는 퍼포먼스도 열렸습니다. 제가 2500년 전 붓다와 함께 지금껏 이어져 온 그 긴 시간의 흐름을 떠올렸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 ‘비움’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지닌 혁명적인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문자 그대로 물질만능의 시대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부를 가치의 시렁 가장 높은 자리에 두는 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습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연봉이고, 자신이나 자녀의 배필을 고를 때도 직업과 재산의 과다를 우선적으로 따집니다. 인품이나 학식을 들먹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짓이고 직업윤리를 따지는 것은 무능한 자의 자기변명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최근 정부 고위 공직자의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화려한 치부(致富)의 치부(恥部)들도 우리는 지켜봤습니다. 그 행태들이 관행의 이름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의 요령 좋은 재테크 수단들로 널리 퍼져 있음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혼탁한 흐름 속에서 ‘정직하게 노동하고, 정직하게 벌고, 정직하게 소비하자’라는, 지극히 소박하고 올바른 구호조차 무기력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비움’은 혁명적인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고 또 습관적으로 써와서 그 무게를 실감하지 못하지만, 비움이란 자본주의의 근본에 대한 거역이고, 인류 문명의 거친 흐름에 역행하는 선언입니다. 혁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Revolution’의 라틴어 어원 역시 ‘되돌리다’라는 뜻의 ‘Revolutio’입니다. 저는 황금축 시대 인류의 스승들이 깨달은 바, 혹은 계시받은 바의 정수가 바로 저 비움의 행복에 닿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한 달 쯤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좁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 갈 집의 평면도를 그려놓고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제가 지닌 것들을 다 옮겨놓기 힘들겠더군요. 부득이 짐 가운데 몇몇 것들을 재활용품으로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끼던 책 가운데 1,000권 남짓을 어렵사리 골라 ‘아름다운 가게’라는 시민단체 재활용품 매장에 기증했습니다. 얼마 뒤 가게 운영진이 전화를 걸어, ‘기증자 이름을 적은 푯말을 달아 서울 시내의 가게 한 곳 서가에 잘 진열해 놓았으니 구경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게 기증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는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기증이 아니라 제 욕심을 지탱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짐이 줄어든 덕분에 이사 온 새 집에서 그만큼의 여유 공간을 누리고 있으니 제가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우연히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누가 그 가게 책장 사진을 찍어 올린 것을 보게 됐습니다. 그 블로그의 주인은 저를 선행자로 소개해놓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과 글을 본 뒤 제 심정은 참 복잡했습니다. 아마 부끄럽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겠지요. 부끄러움 없이 뿌듯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비움으로 행복찾기’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번 캠페인에는 3가지 실천운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몸의 비움입니다. 육신을 돌아보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둘째가 마음의 비움입니다. 내가 아닌 이웃의 행복을 기원하자는 취지입니다. 마지막이 재물의 비움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부 독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