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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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얼마 전 신문에서 “남성은 40대 때 가장 불행하고 반대로 여성은 40대 때 가장 행복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그렇다면 과연 우리 불자들은 어느 때가 가장 복된 자리이고 행복한 자리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느 때가 가장 복되고 행복한 자리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팔정도(八正道)에 들어있습니다. 팔정도의 삶을 살게 되면, 어제보다 오늘 더 잘 살게 되고,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40대를 지나 50대, 50대를 지나 60대, … 그렇게 세월이 지나 생을 마감할 무렵이 되면 가장 복된 인생이요, 행복한 위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방일(放逸)하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에 힘써라. 오직 저 열반을 향해 나아가라. 모든 것은 현재에서 일어난다. 현재를 놓치지 말라. 그것은 삶을 놓치는 것이며 인생을 놓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한량이 없는 온갖 선근도 방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다.』


게으르지 않는 사람이 선근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물질은 없습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생을 마감하는 시간으로는 더 가까워져 있습니다. 불자로서 그 진리를 알았다면, 시간에 얽매여서 쩔쩔매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여유롭고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방일하지 아니함으로써, 게으르지 아니함으로써, 선근(善根)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지혜(智慧)를 닦음으로써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멸할 수 있는 불을 밝히면, 어두움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길이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팔정도, 성인의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것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인식기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식기관으로 본다고 해서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로도, 코로도, 몸으로도, 입으로도, 생각으로도 봅니다. 참기름인지 들기름인지는 눈으로 보는 것 보다는 냄새로 보는 게 빠릅니다. 벽에 가려 있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는 귀로 보는 것이 빠르고 정확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불자가 지혜를 닦는다고 하고, 이것을 가리켜 번뇌와 망상을 소멸하는 이치라고 말하며, 이것을 가리켜 어둠을 해체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팔정도를 통해서 마음이 방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스님네를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고, 보시해서 버림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게으름에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고 과보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재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합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견견지시(見見之時)에는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응용해 보면, 줄 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쓸 것을 쓰는 것은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할 것을 하는 것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은 선근이 없는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현상은 재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나쁜 이름이 자꾸 밖에 퍼집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사람 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는 구족된 몸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을 믿고 따르는 불자라면, 하루하루를 열심히 잘 살면서, 절대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서러워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환희에 차고 법열에 찬 기쁨과 즐거움도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또 불길 같은 고통과 괴로움, 번뇌망상도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중생심(衆生心)을 버리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만 참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세상 어디든지 못갈 데가 없습니다. 그 생각으로 어디를 간다고 한들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그 누구를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끝이 없습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미움 또한 끝이 없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거둬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나고 기쁨과 즐거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악업을 멀리해야하고, 나쁜 생각이나 나쁜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행을 쌓고 닦아 나가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항상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변에 있는 자기 자신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은 일회용으로 쓰지 않는 것이 자신을 잘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심심심(心心心)이 난가심(難可尋)이요, 관시(寬時)에 변법계(偏法界)하고 착야(窄也)에 불용침(不用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그 마음을 찾고 얻고 가질 수 있으려고 하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포괄적으로 넓게 쓰면 우주를 거기에 다 담아도 마음자리는 남아 있지만, 그 마음을 좁게 쓰면 바늘 끝 하나도 용납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은 중생입니다. 부처님의 몸은 법신(法身)입니다. 그래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하는 것도 항상된 내가 있는가하면 무상한 내가 있고, 즐거운 내가 있는가하면 괴로운 내가 있고, 참 내가 있는가하면 나 아닌 내가 있고, 깨끗한 내가 있는가하면 부정한 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상락아정에서의 항상된 나는 법신입니다. 무상한 나는 육신입니다. 즐거운 나는 열반의 자리에 있지만, 괴로운 나는 번뇌망상에 찌들어 있습니다.
참 나는 부처를 발현시키는데, 스스로 나라고 하는 나는 무아요, 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깨끗한 나는 법이요, 깨끗하지 아니한 나는 현상에 드러나 있는 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육신의 입장에서는 육신이나 법신이나 다르지 않아서, 현상은 모양 없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한 것처럼 육신은 법신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금을 법신이라고 가정했을 때, 금으로 어떤 것을 만들면 그 자체는 금이고 만들어진 어떤 것은 금의 모양이 드러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비유하자면, 컵이 없으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을 거기에 담을 수가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컵이 육신이고 물이 본성이라고 보았을 때, 물이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면, 마음은 물과 같고 컵은 몸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이 둘이 아닌 이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신 것은 이처럼 사람들이 육신에 지나치게 애착하고, 집착하고, 치우쳐 있고, 얽매여 있고, 빠져 있어서, 그것을 조율하고 바로잡아 주시기 위함에서였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했던 뜻을 제대로 알고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정진을 하다보면, 이 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은 법신의 모양이고 법신은 육신의 본성이요 본질이며, 그대로가 법신이지 따로 법신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있는 현상은 색(色)이고 있는 그대로는 공(空)입니다.
인식기관으로 보고 느끼고 아는 것만 접근하고 가름해서 그것을 가지고 나의 것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를 불교공부와 수행정진을 통해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수행정진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다보니, 그 무엇인가에 집요하게 치우쳐 있고, 얽매여 있고, 빠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부분이 우리의 삶이고, 어떤 부분이 삶에서 털어내야 할 것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털어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무엇 하나 내 삶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산 사람은 내려놓기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행복해지려는 목마름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해지려는 목마름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세상의 이치요 진리의 실상인, “생명체는 스스로 변해가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본래 집착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 살면 행복해집니다. 못살면 불행해집니다. 잘살면 기쁨과 즐거움이 늘 함께 있는 것이고, 못살면 고통과 괴로움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무엇으로부터 치우쳐 있고, 얽매여 있고, 빠져 있었던 그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를 터득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한살한살, 하루하루 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본질의 현상을 들여다보는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