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영취산
비구 대중보살과 함께 심오한 삼매에 든 붓다
관자제보살에 의해 오온의 자성이 공함을 보이셨네.
제자 사리자, 관자제보살에게 선한 행자의 반야바라밀 행을 물으니
오온조차도 그 자성이 공함을 보라.
색이 공과 다르지 않음을 보라.
일체 법이 공하여 눈에서 마음의 경계까지 머물음이 없다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 『반야바라밀의 정수』 중에서 -
대자비로서 일체의 번뇌를 멸하는 법을 설하신 고타마 붓다에게 예경을 올립니다. 우리는 붓다께서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시고 2천 6백년이 흐른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진리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법다운 불국토를 성취되기를 기원해 왔습니다. 근간은 불 법 승 삼보를 향한 삼귀의이며 이를 바탕으로 일체 중생의 유익을 구현하기 위해 삶 속에서 실천해왔습니다.
붓다의 법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마음의 평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지혜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더불어 발전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삶 속에서 바라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보시바라밀입니다. 지혜와 복덕에 의해 사유된 나의 주체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주체로 삼는 나의 본질을 바로 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 깔라차크라 법회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의도를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들 나름의 행복을 원하지만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을 찾고 해결 방법을 구하고저 함이 아닐는지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항시 그 괴로움의 노예가 되고 마는 번뇌하는 중생들이 이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진정한 금강승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미동이 없는 완전한 보리심을 지니고 체계적인 사유의 힘에 바탕을 둔 공성으로서 마음의 확신이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수행법에 대한 차이 역시 제자에 차별을 두어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 혈 맥 가운데 어느 것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는가에 따라 수행의 방식도 구분이 됩니다.
일부 방법론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께서 비구의 모습으로 소작 탄트라 수행을 하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금강승 수행이라고 함은 만다라의 본존을 관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분명한 바는 개인의 수행력과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그 어떤 수행자가 토굴에서 3년 3개월 3일을 무문관을 했다고 마치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 마냥 자만하거나 추앙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맹신하는 불자의 오류는 무엇이 현실인지 직면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붓다의 말을 의심하는 불자가 되십시오. 실제 지금 상황에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지 분별하여 판단할 수 있는 불자가 되십시오. 단언컨대 당신의 말씀을 살피라고 설하신 교주는 인류 역사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유일할 것입니다. 마치 금을 세공하는 이가 불로 금을 태우고 잘라서 금의 고결한 정수만을 다듬어 추출해 내려 하듯이 붓다의 법에 담긴 바른 이치만을 수용하는 불교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스스로가 자부하는 불자라면 먼저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과연 붓다께서 설하신 수행의 차제가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타당한 근거를 살필 수 있도록 먼저 알고 사유한 이후에 바른 신심을 일으켜 실천해야 합니다.
이번 칼라차크라 법회에서 신비로운 가피만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생각을 고쳐 스스로 일깨우십시오. 궁극적으로 마음이 올바르게 세워지지 않는다면 칼라차크라는 그저 허울뿐인 장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법으로서 마음을 다스림을 통해 일상에 고스란히 물들어 있는 실상의 여여함을 대할 수 있습니다.
『입보리행론』 대부분은 실천 수행을 주제로 삼습니다. 보리심과 공성의 지혜는 제 9장에서 그 정수를 보입니다. 법맥을 밝히자면 『입보리행론』은 캄 출신의 쿠눌라마린포체로부터, 『수행의 차제』의 상 중 하는 사꺄켄린포체로부터 구전의 전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공존을 존중하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안락을 원합니다. 번뇌로 인해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용서를 통해 보다 선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은 본래 선 그 자체입니다. 법이란 절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선한 바 그것이 바로 법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법입니다. 이는 불교가 여느 타 종교와 확연히 부분되는 독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천성인 사랑과 자애는 비옥한 토지의 씨앗이 되어 보다 낳은 세상을 실현하는데 기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의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이 공존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은 공업의 중생이기 때문임을 숙지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다름이 없음을 알 때 더 이상 나에게는 적도 없고 원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집착도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안락을 원하는 것과 같이 타인도 나와 같은 안락을 원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를 살피는 것이 사랑이며 자애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지극히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습니다. 지금 현 시점의 과장된 발전이 지향하는 감각적인 허울의 명분을 보면 그 이면에서 자아내는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공허함으로 인해 가족은 물론 사회 공동체에 분열을 야기해 왔습니다. 때문에 의식의 작용을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일깨우게 되었고 지난 30년 동안 티베트불교는 현대과학과 대화를 시도해 왔습니다.
부디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마십시오. 내 주변의 모두가 벗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타인에게 미소를 짓도록 하십시오. 타인이 당신과 다름이 없는 나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재정립하는 것, 이를 시작으로 나는 21세기에 걸맞은 불교도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소신을 지닌 불교도가 되십시오. 저는 꿈에서조차 붓다의 제자인 비구 사상가 달라이라마라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다양한 불교 철학 사상의 구심점을 잡아 줍니다. 실천에 있어서 사랑과 자비를 배품에는 한 치의 구별이 없습니다. 생명을 지닌 것은 모두 행복해야 한다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지식적으로 문명사에 근거한 인류의 다양성으로 인해 성향이 다른 사상과 철학이 파생되었음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흔쾌히 존중해 주십시오. 한때 기독교의 한 지도자가 달라이라마는 하느님의 제자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부분에 대해 굳이 논쟁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저는 그 기독교인에게 “당신은 불교 수행자에게 하나의 좋은 예시가 되겠군요.”라는 답을 주었습니다. 종교는 최우선으로 공익을 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종교가 사상과 철학의 다름으로 인해 서로 선을 긋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공익에 기여하는 바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성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사원의 번창에만 투자하지 마십시오. 후대에 지속시킬 수 있는 제자를 양성하고 양질의 학업 기반을 세우는데 주력해 주십시오. 저는 티베트어가 인도 나란다 승원의 대 선지식을 통해 기반을 갖춘 논서와 명학으로 조성되어 오늘 날 전 세계에 붓다의 원음을 전하게 된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14대 달라이라마인 저에게 여생의 과제를 묻는다면, 여럿 가운데 분명한 한 가지는 이러한 티베트불교가 시대와 더 소통하고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서원이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