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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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승으로서의 서산 대사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조선시대에 활동했던 서산 대사(1520~1604)하면 임진왜란에 승병활동을 한 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승려로서의 그 분의 사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서산 스님은 불교 중에서도 선종을 널리 선양한 선사이다. 고려 말 이후에 사라져가던 선종의 법맥을 연구하고 조사하여 후세에 그 법맥을 계승해 주신 분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선교결」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글은 제자 사명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제 그 내용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선사로서의 서산 스님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2.
요즈음 선을 하는 이들은 이것이 우리 스승의 말씀이라고 하고, 교학을 하는 이들은 이것이 우리 스승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동일한 진리를 놓고 같으니 다르니 서로 다툰다. 아! 누가 이것을 풀어 줄까?
그런데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학이 언어적인 설명을 이용하여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려는 것이라면, 선은 언어적인 설명 없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언어적인 설명 없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저 세계에 들어가려 하기 때문에 무어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까닭을 알지 못하고 선의 경지를 배워서 알려고 하고 사유를 통해서 획득하려고 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교학을 하는 이들은 교학에서도 6바라밀 중의 하나로 선을 말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선종의 입문 정도에 불과하여 그곳에 선의 참다운 맛은 없다. 단지 그것은 석가세존이 한평생 하신 교학일 뿐이다. 이것을 바다에서 고기 잡는 것에 비유해보자. 작은 어망으로 새우를 잡고, 중간 어망으로 송어를 잡고, 큰 어망으로 고래를 잡는다. 작은 어망은 소승교에, 중간 어망은 대승시교에, 큰 어망은 대승원돈교에 비유한다.
그러면 선의 입장은 어떠한가? 여기에 무엇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완전하고도 온전한 한 물건(一物)이 있다. 이 물건의 겉모습을 보면, 등 갈기의 털은 이글거리는 불꽃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 같고 눈에서는 광채가 번득이고 입에서는 폭풍과 천둥이 친다. 몸을 한 번 뒤척이면 흰 파도에 하늘까지 치솟고 온 산하대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도 어두워진다. 교학에서 말한 세 종류의 그물로도 이것을 건져낼 수가 없다. 이 물건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서는 감로수를 내려 온갖 생명체들을 길러낸다.


3.
요즈음 선의 참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돈오한 뒤에 점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화엄에서 말하는 원돈개념을 끌어들여 화엄선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외도들의 말을 인용하여 신비스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언어나 사유를 매개로 선의 오묘한 이치를 규정하려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마음에 잠깐 반짝이는 느낌이 생기면 그것이 본래의 참 자기라고 하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저 자신도 모르면서 옛 조사들의 흉내나 내어 몽둥이질을 하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는 등 방자한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선종에서 말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부처님의 일대시교 이외에 따로 부처님의 마음은 언어나 사유로 파악되지 않는다. 사유나 언어로 규정하는 행위가 일체 없어야만 그 세계와 하나가 된다.
이런 말이 전해지지 않는가?
석가세존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산회상에서 꽃을 한 송이 들어 보이자 가섭 존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이래로 선종의 의도가 계속 이어졌다. 달마 대사가 양 무제에 성스러운 진리는 없다는 말과, 육조 혜능 선사가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과, 남악 회양 선사가 수레가 안 가면 소를 채찍질한다는 말과, 청원 행사 선사가 여릉 지방에서는 요즈음 쌀값이 얼마인가라고 물은 것과, 마조 도일 선사가 서강에 흐르는 물을 다 마시면 깨달음이 무엇인지 말해주겠다는 것과, 석두 희천 선사가 나는 불교를 모른다는 말과, 어떤 사람이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묻자 입 닥치라고 한 운문 스님의 말과, 차 마시고 정신 차리라는 운문 스님의 말씀 등등은 모두 교외별전을 나타내는 말씀과 행동들이다. 교외별전의 뜻을 사유나 분별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근기들이 너무 빈약해서 교외별전의 가르침을 받기 어렵다. 그 결과 그저 화엄의 원돈圓頓의 가르침을 가지고 사유하고 언어로 규정하여 갖가지의 견해를 낸다. 그리하여 지름길로 가는 방법을 저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인들을 지도할 경우 언어나 사유를 매개로 지도해서는 안 된다. 다만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 그들이 잘 모른다고 이말 저말을 했다가는 남의 눈만 멀게 할 뿐이다.


4.
이상은 서산 스님이 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다. 교학에서도 6바라밀 중의 하나로 선정禪定을 말하는 데, 이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것과는 수준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6바라밀의 선정은 선종에서 말하는 선의 입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언어나 사유를 매개로 대상을 파악한다. 대상을 인식하기도 하고 규정하기도 한다. 사유나 언어로 표출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 말이 없이는 사유하지 못하고, 사유 즉 생각은 반드시 대상을 동반한다. 무엇에 ‘대한’ 생각이지, ‘무엇’이 없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거나 사유하는 행위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반드시 그것을 사용하는 자기 자신이 개입된다. 즉 내가 언어로 무엇을 표출하는 것이고, 내가 사유하는 것이다. 반드시 ‘나’가 개입된다.
그런데 이 ‘나’는 자기동일성이 없는 연기의 존재로 무상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두고 ‘무아’라고 한다. 이 말은 나라는 행위나 의식의 작용성은 실재하지만, 그것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른바 실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러한 ‘나’를 실체로 오해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잘못된 버릇을 자각하지 못하고, 나에 의해서 파악된 대상이 실재한다고 착각한다. 선불교에서는 바로 이런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언어나 사유로 규정되기 이전에 우리에게 즉자적으로 주어지는 역동적이고도 온전한 사태를 직시하자는 것이 선이다. 서산 스님은 이것을 “선은 언어적인 설명 없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려는 것이다.”고 설명한 것이다. 서산 스님이 말하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물을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습으로 보이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물속에 네모난 모양과 둥근 모양이 있다고 고집한다. 선사들은 궁극적으로 그릇을 떠나서 물의 본래 모습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깨달음의 경우도 그렇다. 자기의 방식으로 그것을 체험하라고 한다. 서산 스님이 인용 소개한 역대 조사들의 화두도 결국은 자기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들이다.
깨달음이란 말 대신 인생이라는 말을 대치시켜도 좋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체험만큼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수용한 것만이 인생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고집한다면, 물속에 우유나 독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선의 정신은 개개인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도, 그 체험이 독선화되는 것을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