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복권을 사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도 창 너머로 복권 판매장이 보이면 불쑥 일어나서 달려갔다가 오곤 합니다. 한 번에 두세 장, 그렇게 사는 복권이 매주 10장은 넘을 것입니다.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해도 안 되는 걸 왜 그리 꼬박꼬박 사느냐고요.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또를 사는 게 아니라 희망을 사는 거야. 판매장을 보고도 안 사고 지나치면 꼭 내 운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 같거든.” 그런 그에게 ‘중독자’라고 놀렸더니 그는 제게 “니코틴 중독보다는 낫잖아. 몸에 해로울 것 없고, 돈도 덜 들고!”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제 한 친구의 아버님 역시 열성적인 로또 팬이십니다. 빈 공책에 줄을 그어 1회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당첨번호를 기재해오셨고, 나름의 확률 계산법에 근거해 매주 로또를 사십니다. 매직 팬으로 숫자를 적은 탁구공 45개를 빈 상자에 담아 두시고 가상 추첨을 해서 여섯 개의 숫자를 결정하기도 하십니다. 앞서 소개한 제 친구와 달리 그 어른은 ‘타이밍의 행운’보다는 ‘언젠가는’이라는 믿음과 정성에 대한 보상적 기대에 근거해 로또를 사십니다. 그의 꿈은 1년 정도 세계일주 여행을 다녀온 뒤 시골 경치 좋은 곳에 집 짓고 살면서 과일나무를 심어 가꾸겠다는 것입니다. 그 꿈 역시, 아직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일 년에 두어 번쯤 로또를 사게 됩니다. 대개는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다가 덩달아 사는 경우이고, 이따금 친구들이 제 것까지 사서 선물로 주는 때도 있습니다. 로또라는 것이 참 희한해서,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두고 있어도 문득문득 마음을 한없이 푸근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볍고 행복한 공상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도 합니다. 그 미완(未完)의 행복에는 당첨 확률이라는 수학적 진실을, 잠깐이나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딱한 누군가에게 큰 돈도 선뜻 건넬 수 있을 것 같은 너그러운 마음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현실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오늘의 비루함이 순식간에 화려한 도약의 내일로 치장되기도 합니다. 현대판 흥부의 꿈, 욕망이 욕심을 극복하게 하는 드문 경지가 로또의 대박 속에는 있는 듯합니다. 그런 다양한 심리적 기제들이 복합적으로 가동되면서 로또에 중독되는 것일 터입니다. 로또-복권 일반-는 언젠가부터 도박의 부정적인 너울도 벗어던진 듯합니다. 한 마디로 이제 세상은 복권을 찌질한 루저들의 안타까운 중독 매개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뭔가 공익적인 일에 십시일반 기여하는, 선량한 취미활동쯤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지하철 역사에서 가끔 보게 되는 로또 공익광고가 설명하듯 실제로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후리는 미심쩍은 수작에 불과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어쨌건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 일색에서 자유로워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거액에 당첨된 어떤 사람들의 돋보이는 선행이 그런 변화를 추동한 측면이 있고,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게 된 극소수의 이야기가 증폭되어 진지하고 정당한 희망의 메신저 기능을 하게 된 덕도 있을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 갈수록 세련돼 가는 당첨번호 도출 방식만큼 그 이미지가 투명해진 덕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직하든 않든, 복권은 이미 의외의 다수가 희망의 끈을 매어놓고 있는 기둥으로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저는 추첨 형식의 로또만 이야기했지만 유사도박의 사례는 이미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도(賭)가 아닌 경(競)’의 반열로 승격돼 불리는 경마, 경륜, 경정 등 사업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돈 놓고 돈 먹기’식의 야바위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은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의 운동 논리인 경쟁의 가치사슬 속에 그 운용의 원리를 포섭시켰습니다. 도와 경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주관자인 (준)공공기관의 권위를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투자’라는, 보다 본질적인 자본주의 메커니즘으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주식 투자, 부동산 투자, 금 원자재 농산물…, 가히 의식주를 지탱하는 모든 산물과 산업이 이른바 투자의 그물 속에 포섭된 지 오랩니다. 거기서도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훗날 인체 장기가 실험실 수준에서 벗어나 공장에서 생산돼 거래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인간 생명이 지금보다 훨씬 더 물화(物化)하게 되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의 간과 심장과 콩팥 역시 돋보이는 투자(투기)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또 당첨의 확률은 어이없을 정도로 희박합니다. 45개의 숫자 가운데 5개를 맞추고 보너스 숫자를 못 맞추는 3등 확률이 0.002799243%입니다. 100만 명 가운데 행운의 주인공은 서른 명도 안 된다는 계산입니다. 2등에 뽑힐 가능성은 130만 명 가운데 1명이 안 됩니다. 1등 확률은 0.000012277%, 즉 8,145만 명 가운데 한 명이라는 계산입니다. 이 정도면 이성적 판단으로는 누가 도전할까 싶어집니다. 하지만 유사 이래 복권(광의의 도박)이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생경(善生經)》에도 여섯 가지 위험을 들어 도박을 경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기더라도 미움을 사게 되고, 지게 되면 슬픔에 빠지며, 재산이 줄어들고, 신뢰를 잃으며, 업신여김을 당하며, 혼담에 지장이 있다.” 이성의 세기, 첨단과학의 이 시대에도 로또 매출은 매년 증가 추세입니다. 과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머뭇거려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또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입니다. 100% 확률로 죽음(집단 자살)의 질주를 감행하는 레밍(쥐와 흡사한 포유류) 무리와 달리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감지될 만큼 미미하지만 당첨 가능성이 엄연히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덤빈다는 점 때문입니다. 세포 핵수준의 가능성, 별빛보다 먼 희망을 보며 오늘도 로또 판매점을 찾는 슬픈 이성의 동물들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카산드라라는 슬픈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폴론 신으로부터 미래를 올바로 예측해낼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저주를 함께 받은,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입니다. 이성적 판단이 허용하지 않는 희박한 가능성을 좇아 불나방처럼 투신하는 희망의 맹신자들! 우리는 또 어쩌면 카산드라의 심장을 우리의 내면속에 하나씩 품고 사는 것입니다. 로또와 유사 도박에 쏟아 붓는 천문학적인 돈이 이 세상의 선한 용도로 활용된다면 로또의 신화도 그 빛이 바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종교적 이상 안에서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확인할 따름입니다. 종교적 이상이 카산드라의 예언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참담한 현실과 우후죽순처럼 번져 성업 중인 로또 판매장을 대비시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말- 니코틴 중독보다는 돈이 덜 드니까-처럼, 우리의 값싼 중독이 얼마나 큰 희망을 배신하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