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7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자성과 쇄신을 위한 문화 결사1
    자성과 쇄신을 위한 문화 결사2
    자성과 쇄신을 위한 문화 결사3
    다람살라소식
    명상과 수행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절문밖 풍경소리
    깨달음을 주는 영화
    선지식을 찾아서
    즐거움을 뿌려라
    금강계단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치아건강 칼럼

과월호보기

여유로움 속에서 진지한 삶 살아가야





  
   정우(頂宇)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전 주지
   구룡사 회주


《아함경(阿含經)》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흘러간 과거를 뒤쫓지 말라. 오지도 않은 미래를 갈구 하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린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러므로 현재의 일을 있는 그대로 흔들리지 말고 보아야 한다. 또 흔들림 없이 동요됨 없이 정확히 보고 실천해야 한다.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라. 누가 있어 내일 죽는 것을 알리요. 저 죽음의 군대와 마주치지 않는 자는 없다. 이와 같이 잘 깨닫는 사람은 한마음으로 게으름 없이 오늘의 일을 실천하느니라.』


올해 연세가 86세 되셨다는 한 보살님이 찾아와서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같아 혹시 치매가 아닌지 걱정된다󰡓는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 먹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수없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생각이 그 나이가 되어서도 계속 반복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는 잊고 사는 게 좋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도 놓고 잃어버려야 합니다.
수동기어로 운전을 배운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초보운전 시절에는 기어변속을 할 때 자꾸 기어를 쳐다보게 됩니다. 하지만 운전이 익숙해지면 기어를 안 보고도 몇 단 들어가 있는지 다 압니다.
처음 밥을 지을 때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솥에 손을 집어넣어 손등에 물이 차는 것으로 가늠했지만, 계속 밥을 짓다보면 솥에 손을 넣지 않아도 물의 양을 조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은 밥짓는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불자가 찾아와서 상담하기를, 󰡒올해 나이가 84세인데, 온 몸이 자꾸 쑤시고 아파, 큰 병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이 들어서 아픈 것은 병이 아니라 노환이요, 근심입니다. 근심일수는 있지만 그것을 병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사바세계의 현실이고 우리들이 목전에서 느끼고 끊임없이 보고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지구의 자전속도에 비유하자면, 초속 465m이니까 똑딱똑딱 2초면 거의 1km를 달려가 버린 것이요, 1분이면 27.75km를, 1시간이면 1,666km를, 하루 24시간 동안에는 무려 4만km를 달려가고 달려온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거리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60살이 되었든 70살이 되었든 80살이 되었든, 나이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 반대로 보자면 하나같이 많이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대의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 속에 살다 보니, 마치 현재의 상황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또 거기에 도취되어 있다가, 어느 날 그것들이 파탄을 일으키고 부조화 현상을 일으키면 울고 불며 괴로움과 슬픔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의 얼굴이요, 무지몽매한 소치입니다.
시간의 관념에서 보면 설사 그것들이 현재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 스스로가 떠나야 될 그런 날이 오는데도 말입니다.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은 떠날 날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세론적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순간순간의 삶을 더 소중히 할 줄 알아야 되고, 왔으면 반드시 가야하기 때문에 있는 동안에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존재 영역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으로 천차만별이지만, 모두가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이(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한 이치를 잊지 않고,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사실을 인정한다면 단 1초라도 함부로 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인과의 법칙에 따라 함부로 살지 않은 사람이라면 설사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라도 지금보다 나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깃든 생로병사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릅니다. 마음은 절대 늙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거기에 맞춰줄 뿐입니다.
마음은 배고픈 적이 없습니다. 마음은 추운 적이 없습니다. 본래 마음은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 마음을 감싸고 있는 그 무엇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뿐입니다. 영혼이라고도 하고 업이라고도 하고 제칠말나식(第七末那識)이라고도 하는 것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사대육신으로 이뤄져있는 이 몸이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청정무구한 마음자리에는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물질적 존재에 깃든 실상이나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나타나는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30대쯤 되어 보이는 한 여자가 출연해서 하는 말이 매일 아침마다 화장하는 시간이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것이냐󰡑고 진행자가 묻자,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 여자분이 참으로 아금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왔으면 언젠가는 가야하는 이치가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 아니라 무상한 것임을 요달 해서 안목 있는 지혜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충분히 그런 것들이 정립될 것이라는 것을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불자들은 보았으면 합니다. 그 허망함을 깨닫고 그 무상한 이치를 요달 해서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어떤 재앙이나 어떤 괴로움이나 어떤 고통이 닥친다하더라도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참자유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참자유인으로 가는 길이 바로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을 증득하는 일입니다.
따로 구할 것이 없습니다. 잘살면 성불도 하고, 잘살면 극락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잘사는 것 자체가 복덕과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복은 짓는 것이고, 덕은 나누는 것이며, 지혜는 닦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사는 모습이 바로 복과 덕과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실습을 하는 것을 기도라고 하고, 정진이라고 하고, 올곧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는 실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내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꾸 드러내서 번뇌하고 치를 떨며 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속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깃장을 놓을 때도 있습니다. 부부지간은 물론이고, 형제지간에도, 부모와 자식 지간에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는 좀 더 들여다보면서 내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자는 겁니다. 무엇을 목말라하고 있는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내면에 있는 그것을 향해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나를 놓아줘야 합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내가 컵을 든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보이기 위함이기도 하고, 내가 갈증이 나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갈증이 나서 컵을 들고 있는데, 누군가 그 컵에 물을 따라줘서 갈증이 해소되었다고 고마운 마음에 한없이 그 컵을 들고 있다면, 그 때는 내가 컵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컵에 붙들려 있을 뿐입니다.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되기도 하지만 자유라는 본래의 의미는 조화입니다.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자기가 할 도리와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너무 많은 이가 퍼마셔서 말라버린 옹달샘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쓸 만큼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옹달샘에서 물이 솟아나듯이 재능과 복도 끊임없이 지으면 됩니다. 지으면 지은 만큼 솟아납니다. 그 재능과 복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닦으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잘 살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과 덕과 지혜는 다른 데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내면의 저장소에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그 마음이 무엇에도 흔들림 없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구룡사 법당에는 법회날이 아닌데도 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참배를 합니다. 인등실에는 기도시간이 아닌데도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행동이 명상이면 어떻고, 참선이면 어떻고, 요가면 어떻고, 또 그냥 앉아있는 것이면 어떻습니까? 밥상머리에 앉으면 밥 먹기는 수월하지만, 밥상머리에 앉았다고 꼭 배부른 건 아닌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잠이 안 오는데도 남들이 누워있다고 함께 누워본들 잠이 오겠습니까? 오히려 잡념만 더 들뿐입니다.
즉, 매사에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소질을 조화롭게 발휘할 수 있는 내면의 외침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너무 깊이, 너무 빨리,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듣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너무 빨리 달리려는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빨리 달린다고 그 시간만큼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여유를 가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시간보다 빠른 게 지구상에 뭐가 있을까요? 빛의 속도는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여과과정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될 노병사가 있기 때문에,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서두르지 말고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멈춰있는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휴식의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쉬는 것까지도 쉬는(休止)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는 좀 여유로운 시간을 살 수 있는 제가 될 수 있도록 월간 붓다 구독자 제현들께서 지켜봐 주시리라 믿으면서, 아울러 제가 해야 할 일들은 놓치지 않고 열심히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