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장자는 어느 날 제자를 불러 이야기 한다. “어젯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고 즐겁게 노닐었는데,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 것도 잊어버렸다. 꿈에서 깨고 보니, 나비가 아니라 내가 아닌가? 꿈속에서는 분명히 내가 나비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꿈을 깨고 보니 나비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나인가. 이것도 깨고 나면 내가 아닌 것 아닐까?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인가.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된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교에선 ‘꿈을 깨라’,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삶 자체가 바로 꿈이므로 그 허상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다치면 아프고, 갈증나고, 배고프고, 슬프고, 즐겁고… 이토록 생동감 나는 현실이 모두 가짜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이처럼 심오한 실상과 가상의 세계를 다루며, 무의식을 건드리고 있다. 우린 이미 <아바타>란 영화를 통해 ‘나’와 ‘나의 분신’을 보았다. <매트릭스>에선 ‘나’와 ‘분신’만이 정신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의 현실’을 오간다. 인간이 인공지능 기계를 만들어 축배를 들었지만, 그것은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매트릭스는 그런 기계들이 만든 세계다. 이미 컴퓨터가 발달했기에 컴퓨터 안에 얼마든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컴퓨터 시스템이 도리어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매트릭스는 모든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인간들은 모두 그 시스템에 잘 길들여져 있어서 그것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긴 텔레비전 속의 드라마를 보고서도 울고 짜고, 환호작약하기도 하니, 꿈과 현실의 간극은 갈수록 좁아지는 셈이다. 더구나 물물교환은 먼 옛날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모두가 컴퓨터 속에서 물자와 증권 거래, 계좌이체가 이뤄져 손으로는 물건이나 돈을 만져볼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고 있으니, 이미 가상 사이버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면, 정말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가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이 도래할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과학문명이 계속 발달해 기계가 인공지능을 갖추게 되어 스스로 지능을 한없이 발전 상승시켜 인간을 노예로 부릴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사무직 근로자들의 상당수는 하루 온종일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수록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게 사이버에서의 일인지, 실제 일인지, 아니 사이버와 실제의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모호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의 주인공들은 그런 ‘컴퓨터 시스템’과 싸워 본래의 세상을 되찾으려는 저항군들이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등 저항군들의 ‘선택’을 받은 네오가 그들에게 가담한 것이다. 저항군의 두목인 모피어스가 구세주로 믿는 네오조차 시스템에 길들여져 살아왔기 때문에,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생시고,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알지 못한다. 처음 네오를 부른 모피어스는 두개의 알약을 꺼내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먹도록 한다. 파란약을 먹으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 그냥 이 세상은 어떤 특정한 신이 있어서 창조했고, 그 신이 다 알아서 하며, 지상의 모든 것은 그저 피조물일 뿐이라는 식의 믿음도 그와 같다. 하지만 빨간약을 먹으면 ‘믿음’이 아니라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게 된다. 믿음보다 고통스럽더라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직성이 풀린다. 깨달음을 얻는 불교의 여정과도 같다. 결국 네오는 빨간약을 선택해 먹는다. 저항군들이 있는 우주의 함선에 간 네오가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할 때 모피어스는 말한다. “진짜 현실 같은 꿈을 꿔본 적 있나? 그럴 때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지?” 모피어스가 던지고 있는 물음은 바로 장자의 물음에 다름이 아니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온 그 몸을 벗고,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게 된다. 너무 충격적인 과정을 겪은 네오가 “내가 죽었나요?”라고 묻자, 모피어스는 “그 반대지”라고 답한다. 그런데 진짜 삶이라고 하는 세상의 모습이 마치 ‘컴퓨터 같다’. 인간 세상에서 무지한 자가 뭔가 지식을 습득하려면 많이도 배워야한다. 한글과 구구단부터 깨치고,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그러고도 끝이 없다. 그렇게 배우고도 뭔가 프로가 되려면 석사 따고 박사 따고 그리고 더 공부를 해야, 프로로 인정을 받는다. 그렇지만, 컴퓨터는 다르다. 과학에 대해서 무지한 내 컴퓨터에 과학백과사전 프로그램을 깔면 척척 박사가 된다. 또 바둑에는 깡통이었던 컴퓨터에 바둑 프로그램을 깔면 바둑의 고수가 된다. 태권도의 태자도 인지하지 못했던 컴퓨터에 태권도 프로그램을 깔면 상당한 고수가 등장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도 한다. 만약 우리도 컴퓨터처럼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원하는 프로그램을 우리 무의식 속에 집어넣어 그런 고수가 될 수 있다면? 이 영화에선 가능하다. 네오는 그런 프로그램 로딩을 통해서 태권도와 쿵푸를 익혀 고수가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약 그처럼 프로그램 로딩을 통해 모든 것을 습득할 수 있다면, 좋은 프로그램을 구입할 수 있는 부자와 권력자들만이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세상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상정은 명상 비법과 닿아있다. 우리 인간은 번뇌에 휩싸여 있어 좀체 집중하지 못하지만, 마음을 비운 상태에선 컴퓨터에 로딩 하듯이 쉽게 집중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기도의 성취는 이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무의식 위의 다양한 의식 층에 오가는 무수한 번뇌망상으로 인해 깊은 무의식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게 쉽지 않다. 불교에서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하는 것도 이런 무의식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 습이 되고 이것이 업이 되었기에 쉽게 변화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습관만 고치려하더라도 적어도 백일 동안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야 변화의 화살을 당기는 것이고, 변화를 시작했다면 적어도 천일은 지속되어야 업이 고쳐질 수 있기에 천일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깊은 심층의식 차원의 변화를 위해 인도 요가들은 ‘요가 니드라’(잠 요가)를 하고, 티베트불교에선 잠 수행을 하기도 한다. 8년 전 1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면서 닝마파의 종정을 지낸 민돌링 린포체를 친견한 적이 있다. 그는 평생 잠을 자면서 수행했기에 ‘잠자는 린포체’로 불리는데, 필자가 히말라야 데라둔에 있는 그의 처소를 방문했을 때도 역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잠시 머리를 축복해준 다음에 곧바로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민돌링 린포체에 대해 달라이 라마 존자는 ‘완전한 정복자’라고 존경을 다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티베트 수행에서도 깊은 무의식의 변형을 하는데 잠과 꿈을 이용하고 있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심취한 정신의학자 구스타프 융이 무의식의 세계에 천착한 것도 모두 인간 변화의 키를 무의식이 쥐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네오가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선택했다하더라도, 무의식을 변화시키는데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네오는 로딩프로그램에 의해 온갖 무예의 고수가 되었지만, 건물 옥상에서 다른 건물 옥상으로 뛰는 실전 훈련에서 길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아직도 절대적인 자기 확신이 부족한 때문이었다. 네오를 사랑하는 저항군의 여전사인 트리니티도 매트릭스의 나쁜 요원들에게 쫓길 당시 쓰러져서도 ‘일어나 트리니티!’ 하면서 스스로에게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살아난다. 화두선에도 분심과 의심에 앞서 핵심은 믿음이다. 자기가 부처라는 믿음이야 말로 모든 것의 출발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네오가 자신의 위대성을 믿기 시작했을 때 나약한 한 인간이 거대한 적과 싸워 이기게 된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노예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꿈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