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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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와 부휴에게 선교禪敎를 배우다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조선후기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인 완호 윤우(玩虎倫佑, 1758~1826)는 당시 불교계를 다시 일으킨 사람으로 두 사람을 거론했다.


서산의 문도는 천여 명이다. 그중 향을 사르고 입실入室한 자가 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는 사직社稷을 보존한 공적이 있고 종풍을 총림叢林에 드날렸다. 제자 중 두 사람이 크게 번창하니, 소요 태능逍遙太能과 편양 언기鞭羊彦機이다. 수백 년 동안 문호가 크게 발전하였다.


청허 휴정이 조선불교의 이념을 제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면 소요와 편양은 그 기반 위에서 선교학을 발전시켰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일생을 바쳤음을 의미한다. 소요는 전남 담양潭陽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큰 수레를 끌고 갈 사람을 잉태하였다고 축하하였으므로, 어렸을 때 이름을 대승大乘이라 하였다. 13세에는 백양산白羊山에 들어가 성진 화상性眞和尙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비로소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 뒤에 지리산과 인연을 맺어 대대적으로 사찰을 지으니, 그 남쪽은 신흥사神興寺이고 그 북쪽은 연곡선원燕谷禪院이다.
소요는 어려서부터 경론經論에 널리 능통하였는데, 이윽고 말하기를 “법法 밖의 종지宗旨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고, 서산 대사西山大師를 찾아가 참례하였다.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고 외운다 한들 부처의 골수는 얻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 마침 어떤 스님이 서산대사에게 묻기를 “초조初祖 달마達磨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는데, 서산 대사가 불자拂子를 들고 한 번 휘둘렀다. 그때 법사가 크게 기뻐하며 게偈를 바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蘧廬天地假形來 거려천지가형래
慙愧多生托累胎 참괴다생탁루태
玉麈一聲開活眼 옥주일성개활안
淸宵風冷古靈臺 청소풍랭고영대


여관과도 같은 천지에 형체를 빌려
부끄럽게도 많은 삶이 태에 의탁하네
휘두른 불자의 일성에 눈이 번쩍 뜨이니
맑은 밤 서늘한 바람이 마음에 부네


서산 대사가 말하기를 “이는 잠깐의 기로岐路일 뿐이다. 조사祖師께서 말씀하기를 ‘깨달음은 아직 깨닫지 못함과 같나니, 마음도 없고 법도 없다.’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은 주장할 수 없으니, 너 스스로 보호하고 부지扶持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소요는 고덕古德들을 두루 찾아 가르침을 청하다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대사를 뵈었는데, 부휴 대사가 소요를 훌륭한 인재로 여겨 대장경大藏經을 가르쳤다. 부휴는 조선시대 불교계의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불릴 만큼 『화엄경』과 대승경전에 조예가 깊어 그 제자가 700여 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이후 소요는 다시 서산 대사를 찾아가 말하기를 “화상和尙께서 전에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거품을 다 태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리석은 저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저의 미혹迷惑한 점을 분명하게 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서산 대사가 말하기를 “아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요는 곧바로 깨닫게 되어 아홉 번 절하고 물러났다.
소요는 늘그막에 깨달음과 후학을 양성하는 덕을 성취하여 총림叢林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원근遠近에서 그를 숭모하여 귀의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승려들이 모여들어 그 숫자가 항상 수천을 헤아리니, 산문山門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같았다. 그는 정법正法의 눈으로 자비와 지혜를 운용하여 곧장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가리키니, 실로 중생을 건네줄 뗏목이며 법문의 동량이었다.
그는 어느 날 대중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누리가 일개 사문沙門의 눈 안에 있으니, 온 누리가 자기의 광명 속에 있는 것이라네. 광명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허공조차 없거늘, 하물며 산하와 국토가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석장을 세우고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외로운 달이 홀로 비춰 강산은 고요하기만 한데, 스스로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네.”라고 하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불자佛子는 이 도리를 알겠는가. 소요가 대장경을 공부하다 청허를 찾아가 선禪을 배웠듯이 말과 글에 취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소요의 제자 해안海眼과 묘담妙湛 이하 강당과 강단을 열고 불법의 요체를 받들어 전한 사람이 60여 명인데, 그들이 모두 말하기를 “법사는 임제臨濟의 26세 적손嫡孫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제자 가운데 걸출한 인물은 해운 경열(海運敬悅, 1580~1646)이다. 옛 일을 전해들은 다산 정약용은 “이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가짐이 마치 ‘상대의 훌륭한 점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한다(見賢思齊견현사제)’는 가르침과 같았다.”고 했으니 사제의 인연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짐작이 간다.
소요 대사의 문도들이 수백여 명이나 되지만, 오직 경열만이 그의 종통宗通을 이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그의 호를 해운海運이라고 한 듯하다. 해운이란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간다는 의미이고,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는 유유히 소요逍遙함을 뜻하니 소요 대사의 전법傳法이 곧 해운이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소요 스님이 해운 스님에게 마음을 전하고 법을 전하면서 읊은 게송은 이러했다.


우뚝한 기봉機鋒은 흐르는 별이요 폭죽爆竹이며
높은 기상은 돌이 갈라지고 벼랑이 무너지는 듯하네.
사람을 대함에 죽이고 살림은 군왕의 칼 같고
늠름한 위풍威風은 오호五湖에 가득하네.


소요는 지리산 연곡선원에서 34년 동안 머물다가, 마침내 1649년(인조27) 겨울에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입적하니, 향년 88세였다. 그들의 예법에 따라 다비식을 마치고, 제자 명조明照와 경흘敬屹 등이 정수리뼈를 받들어 보개산寶蓋山에 안장하면서 사리舍利 2과顆를 석탑에 갈무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또 큰 빗돌을 다듬고는 그의 제자 경열景悅에게 소요의 행장을 가지고 서울로 달려가게 하여,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1589~1670)에게 비문을 적게 하였다. 이민구가 지은 소요의 비명은 다음과 같다.


西竺之敎流東瀛 서축지교류동영
自東而南南土傾 자동이남남토경
恒星夜發隨雨零 항성야발수우령
雨零點點散光晶 우령점점산광정
大千世界昭厥靈 대천세계소궐령
逍遙開士法門楨 소요개사법문정
宴坐南嶽不下庭 연좌남악불하정
蠅附蟻慕誰使令 승부의모수사령
點鐵琢璞寶乃成 점철탁박보내성
惠爾瞽聾視而聽 혜이고롱시이청
臘月晦日超化城 납월회일초화성
彈指萬劫了死生 탄지만겁료사생
有大弟子後事營 유대제자후사영
攻珉鑱辭垂千齡 공민참사수천령
藤葛無絶昧者明 등갈무절매자명


서축의 종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져
동에서 남으로 가니 남쪽으로 기울었네
항성이 밤에 빛나 비가 따라 내리니
빗방울 하나하나에 빛이 흩어지네
대천세계에 그 영험함 밝게 드러나니
소요 개사는 법문의 기둥이네
지리산에서 좌선하며 뜰에 내려오지 않아도
파리가 붙고 개미가 좋아하니 누가 시킨 일이랴
쇠 점화하고 옥 다듬어 보배 이루듯
눈멀고 귀먹은 너희를 보고 듣게 하였네
섣달 그믐날 열반에 드니
한순간에 만겁의 삶을 마쳤네
훌륭한 제자들이 사후의 일 경영하여
빗돌 다듬고 글 새겨 영원히 후대에 드리우니
칡넝쿨처럼 끊임없이 전해져 모르는 자도 알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