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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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리의 비판적 읽기가 필요한 이유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필자는 불교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직업인데, 학교 공동체의 안에서는 학생들에게, 밖에서는 신도 또는 스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불교 교리는 도대체 ‘영점’을 잡을 수 없다. ‘종’을 잡을 수 없다.
극락만 해도, 서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있다느니, 그게 아니고 제 마음 속에 있다느니, 모든 것(法)이 죄다 공하다고 하더니, 아니다. 열반이나 불성은 불생불멸이라 하며,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은 고해를 건너는 보배로운 뗏목이랬다, 때로는 불쏘시개니 똥 닦아버린 휴지랬다,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분명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영축산에서 설법하신다느니. 게다가 승단의 운영에 관한 율장律藏의 해석, 각종 경장經藏에 담긴 교리 해석 문제로 들어가면 더욱 심각해진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비판적 읽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교판敎判’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 있는 ‘전문가’들은 대개 ‘철학과’ 또는 ‘불교학부’ 소속 ‘교수’도 있고, 조계종이나 천태종이나 진각종 등을 비롯한 ‘종단’ 소속 ‘스님’도 있다. ‘교수’가 되었건 ‘스님’이 되었던, 이들이 하는 말들이, 또는 그들이 제시하는 책들 속에서 하는 말들이,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종’을 잡을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불교 ‘전문가’라면 이런 하소연에 귀 기울이고 해결책을 제시할 책무가 있다.


2.


그러면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그 대답은 불교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100년이 지나면서 교단이 ‘분열’한다. 왜 ‘분열’ 되었을까? 당시의 승려들이 화합정신이 없어서인가? 그건 아니다. ‘부처님과 같이 살았던 스님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 자체에 원인이 있다. 이야기들 자체에 해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한어’로 기록된 『아함부』나 ‘빨리어’로 기록된 『니카야』나, 이 모두는 ‘분열한 부파들이 전한 이야기 모음집’인데, 2천 여 년 가까이 서로 교류도 없던 두 문화권에서 각각 만들어진 『아함부』와 『니카야』의 내용이, ‘근대식 불교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두 문헌 내용은 부처님과 당시 스님들이 주고받은 이야기이다”는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없다.
위와 같다면, 그렇다면 『아함부』와 『니카야』를 ‘종’으로 잡으면 될까?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긴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불가능했다. 『아함부』 또는 『니카야』의 ‘본문’ ‘해석’에서 입장 차이가 났고 결국 ‘분열’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본문’이 담고 있는 텍스트 자체가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영영 ‘종’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인가? 어찌해야 ‘영점’ 또는 ‘종’을 잡을 수 있는가? 필자에게 한마디로 말하라면, ‘해석’ 방법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해석’이라니 무슨 해석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텍스트’의 해석이다. ‘텍스트’에는 좁게는 ‘불교 문헌’이 있고 넓게는 ‘실존적 삶’이 있다. ‘불교 문헌’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어 별로 말했으니 생략하고, 그러면 필자가 말하는 ‘삶’이란, 한 인간이 개인 또는 그런 개인들이 쌓아놓은 긴 역사의 퇴적을 깔고, 현재를 살아가는 인생살이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를 한 개인이 체계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차선의 방법이지만, 역사 속의 유명한 고승들이 해놓은 ‘해석’ 방법을 따르는 것을 권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고승들의 ‘해석’ 중에서는 불교 역사의 긴 세월 속에서 상당한 지역과 기간 동안 공유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간단하게만 말하면, 소위 ① ‘남방 상좌부 계통’의 해석인데 현재에도 미얀마 내지는 태국 또는 스리랑카 등 지역에 유통되고 있다. 또 ② ‘반야부 중관 계통’의 해석인데 현재 달라이라마 스님을 비롯한 티베트 불교에 전승되고 있다. 또 ③ ‘유식 법상 계통’의 해석인데 현재 일본의 일부 종단이 계승하고 있다. 또 ④ ‘화엄 법성 계통’의 해석인데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불교계에 전승되고 있다.


4.


“아이고! 신 교수. 뭘 그리 따지시오?” 이렇게 누군가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뻔하다. “현실을 보세요.” 지금 절마다 백중 기도 안내가 한창이다. 우란분절(백중)이 ‘재齋’면 어떻고 ‘제祭’이면 어떠랴. 내 조상 네 조상 위패를 같은 단에 써 붙여 그 앞에 음식 차리고, 고슴도치 가시처럼 숟가락 촘촘히 꽂아놓고, 잔에 맑은 물 따라 향로에 휘휘 돌려 상에 올리고 나서, 두 번 절하고, 돌아서서 염불하는 스님들께 절한다. 더러는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 위패도 나란히 한다.
『우란분경』 어디를 읽어봐도 이런 법은 없다. 조선시대 어떤 의례문을 봐도 역시 없다. 최근에 생긴 현상이다. ① 재가불자들이 7월 보름 안거를 마친 승가에 공양을 올리면, ② 수행을 마친 스님네들이 공양물을 불탑이나 불상 앞에 올리고, 재가자들의 소원을 빌어주는 것이다. 소위 신도들이 할 일은 ①뿐이다. 우란분절(백중)은 승보께 공양하는 ‘공불재승供佛齋僧’ 행사이다.
‘공불재승’이 본질本質이고, 조상천도는 지말支末이다. 경전 주석가들은 모두 그렇게 ‘해석’ 했다. 내 조상님 위패 옆에 남의 집 개 위패를 두면 되니 마니 싸울 일이 아니다. ‘마구단’에 여물 놓듯이, 개나 고양이 단을 따로 차렸으니 사료를 놓아야 된다는 말도 속절없다.
‘수자령’은 어찌할까 고민이 필요 없다. 지옥-아귀-축생의 3악도에 들던, 아니면 인간-아수라-천상에 들던, 혹은 아예 해탈하든 어딘가에 존재한다. 이제 막 죽어서 윤회 대기에 있는 ‘중유中有’ 또는 ‘중음신中陰身’의 상태이면 ‘법식法食’을 베풀어 생전의 업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재齋’를 지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존중이다. 긴 윤회의 전생을 놓고 보면 그것도 부모-자식으로 맺을 정도의 중한 인연으로 말이다.  
어느 지역 어떤 형태로든 윤회하여 지금을 살아가는 전생의 (나도 모르는) 내 피붙이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중요하다. 평소 수행을 잘 해 부처님처럼 해탈하여 윤회에 들지 않는 조상이면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신도들은 그런 마음으로 돈을 모아 스님들께 드리면 된다. 그 돈 받은 스님들은 시주님의 그 마음을 헤아려 절에서 쓸 만큼 쓰고, 유연 무연 중생들에게 나누면 된다. ‘화엄 법성 계통’에서는 그렇게 ‘해석’한다.


5.


필자가 말하는 ‘화엄 법성 계통’의 해석 전통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순제심-지상지엄-현수법장-청량징관-규봉종밀-장수자선-진수정원’으로 계승되는 ‘화엄종’에서 제시하는 ‘해석’ 전통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해석’ 전통을 고수하는 승려교육기관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사라져가고 있다.
다 꺼진 불이지만 아직 고로古爐의 온기가 남아 있으니, 그 분들이 손에서 손으로 전승해온 서적들을 지팡이 삼아, ‘종’이 되었든 ‘영점’이 되었던 갈피를 잡겠다는 게 필자의 ‘꿈’이다. 그 ‘꿈’이 나 혼자의 잠꼬대인지 아니면 불교의 희망인지는 남들이 평가할 일이고, 나는 그저 그게 내 할 일이라 생각하고 글 쓰고 강의한다.  
필자는 어느 시인의 시집 『낙뢰목落雷木의 여심餘心』처럼, 그렇게 믿고, 경운-석전-운허-월운 등 화엄강백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근사近思’가 되던 ‘전습傳習’이 되던, 경전과 세상을 ‘해석’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좁은 의미는 물론 넓은 의미의 ‘텍스트’ 해석을 철학의 업으로 삼고 있다. 그 일환의 하나로 대중잡지인 『월간 붓다』에 “꼭 읽어야 할 『화엄경』”이라는 고정란을 빌어, 화엄교학의 ‘해석’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다.


6.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미루고 ‘불교 각파의 주장(宗)과 목표(趣) 분석’에 대한 ‘화엄 법성 계통’의 ‘해석’을 결론만 먼저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취론宗趣論’이다. 화엄의 법성 교학에서는 ‘인연因緣’을 불교의 핵심으로 꼽는데, 이를 둘러싼 해석이 불멸 후 5종으로 분열되었다고 해석한다.
①은 ‘수상법집종’으로, 그 중에는 ‘아’와 ‘법’이 모두 실재한다는 독자부 등의 해석, ‘아’와 ‘법’이 모두 공하다는 여러 부파의 해석, ‘아’와 ‘법’이 모두 명목뿐이라는 일설부 등의 해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②는 ‘진공무상종’으로’, 용수와 제파 등 중관 반야 계통의 해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③은 ‘유식법상종’으로, 무착 세친 등의 해석이 여기에 속한다. ④는 ‘여래장연기종’으로, 마명과 견혜 등의 해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⑤는 ‘원융구덕종’으로, 화엄교학의 해석으로 ‘법계연기’ 즉 ‘사사무애연기’가 여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