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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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불교를 부활시키다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09~1565)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1565년(명종 20) 4월, 명종明宗 임금님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돌아가셨다. 왕후는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그동안 보우普雨스님을 신임하여 불교의 부흥을 꾀하여 1550년(명종 5)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도첩제僧科·度牒制를 다시 실시케 하였다. 또한 중종 임금님의 능陵을 보우스님이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이장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1565년 4월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기로 한 전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금 이 보우普雨의 일은 온 나라가 다 같이 분노를 느끼어 그의 살을 찢어발기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는 항의하는 소疏를 올리고,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번갈아 글을 올리며, 옥당玉堂에서는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 여러 날을 두고 끊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전하께옵서는 더욱 못들은 체하시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은 놀라고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모두들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온 나라의 공론은 믿지 않으시고 한 요망한 중만을 옹호하신다.”고 합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 그해 8월, 율곡(栗谷, 1536~1584)이 보우스님을 처벌하자고 왕에게 올린 상소문 가운데 일부분이다. 보우스님이 하늘이 낸 물건을 함부로 없애고 사녀士女들을 속이고 현혹시켜 참람되게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만들고 지존至尊을 욕되게 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상소문에서 “보우가 제 뜻을 마음대로 행한 지 지금 여러 해째로서, 죄와 복을 멋대로 베풀어 임금을 속였으며, 궁 안의 재정을 고갈시켜 백성들에게 환난을 끼쳤으며, 교만하고 뽐내 스스로를 성인聖人인 체하여 자신을 높여 사치스럽고 참람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비난하였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명종실록』은 보우스님을 ‘요망한 승려’로 몰아 죽이자는 신료와 유학자, 성균관 생도들의 상소문으로 채워졌다. 마침내 스님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귀양을 갔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장살杖殺당해 죽었다. 맞아 죽은 것이다.


幻人來入幻人鄕 환인래입환인향
五十餘年作戱狂 오십여년작희광
弄盡人間榮辱事 농진인간영욕사
脫僧傀儡上蒼蒼 탈승괴뢰상창창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들어가        
50여 년간 미치광이 놀이를 하였네.    
인간 영욕의 길을 다 놓고,             
승려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르네.  
 
스님의 임종게다. 폐허가 된 조선의 불교를 회생시키는데 진력한 스님의 임종게 치고는 혹독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생을 살았지만,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읽을 수 있다. 스님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훗날 조선불교를 대표한 중흥조 청허 휴정스님은 보우스님을 “천고에 둘도 없는 지극한 성인”이라고 극찬했다. 청허와 그의 제자 사명당은 스님과 문정왕후의 노력으로 부활한 승과에 합격하여 판사判事가 된 인물들이다.
스님은 법명은 보우普雨, 법호는 나암懶庵, 당호가 허응당虛應堂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용문사에 머물다가 15세에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출가했다. 이곳에서 학문을 익혔고,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에서 6년 동안 정진하면서 대장경과 『주역』을 공부하였다.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지행智行스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다. 특히 재상 정만종鄭萬鍾과의 교유에 의해 문정대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스님이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1548년(명종 3) 함흥 국계암을 떠나 호남 쪽으로 내려갔다. 스님은 당시 병이 나서 요양 차 회암사에 머물렀고, 이때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함경감사 정만종이 스님을 문정왕후에게 추천한 것이다. 39세의 보우스님이 선종판사禪宗判事와 봉은사 주지를 맡고, 수진守眞스님은 교종판사와 봉선사 주지를 맡았다.


1548년(명종 3)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임명받아 취임한 뒤, 문정대비로 하여금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해 능침에 들어와 난동 부린 사람들을 처벌한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난 직후부터 유생들의 스님과 절에 대한 횡포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절이 풍광이 빼어나고 놀기 좋은 자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스님들에게 가마를 매게 하고 기생들을 데리고 법당法堂에 산해진미를 차리게 한 것이다. 항의하는 스님들이 있으면 죽지 않을 만큼 혹독하게 매질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것뿐이 아니다. 대장경을 비롯한 귀중한 책들을 불사르거나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으면 가져가는 일이 잦아서 세종대에는 수령이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결국 이 무렵부터 보우스님은 봉은사(선종)와 봉선사(교종)에 방을 붙여 유생들의 횡포를 막았는데, 이때부터 스님을 비난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스님은 당시 명종임금에게 세 가지를 건의한다. 첫째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僧科를 부활시킬 것, 둘째는 승려 도첩度牒 제도를 실시할 것, 셋째는 유생에게 빼앗긴 절이나 황폐한 절을 회복시킬 것 등이었다.
급기야 조선불교는 1550년 12월 문정왕후가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림으로써, 1551년 5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하였다. 같은 해 6월 봉은사가 선종의 본사本寺로, 봉선사가 교종의 본사로 지정되었고 보우스님은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도승시度僧試를 실시하여 도첩제도를 부활시켰고, 1552년 4월 승려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 청허 휴정과 사명 유정은 10년 차이를 두고 승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이끌고 호국불교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사명 유정은 18세가 되던 1561년에 봉은사 선과에 합격한 뒤에도 보우스님의 보살핌을 받았다.


보우스님은 1555년 9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던 불교계에 부활할 수 있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승단僧團이 안정되고 불교세가 활발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그 후 1560년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 직책을 맡았으나, 운부사雲浮寺에서 왕자의 태봉胎峯이 있는 산의 나무를 베어 사원을 증축한 일에 연루되어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봉은사를 물러나게 세심정洗心亭에 머물렀다. 같은 해 12월 다시 선종판사로 임명되어 봉은사에 머물렀다. 불교가 존립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다 보니 그의 인생도 부침浮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 4월에 회암사 중창사업을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였지만, 같은 달 문정왕후가 죽자 한계산 설악사雪岳寺에 은거하였다.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1565년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우리 대사께서는 동방의 좁은 땅에 태어나 100년 동안 전해지지 못한 도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어, 이 도를 마침내 사라져 끊어지지 않게 하셨다. 이 분이 아니었다라면 영악풍류靈岳風流와 소림곡자小林曲子가 사라지고 들리지 아니할 뻔하였다. 이런 점에서 천고에 홀로 왔다 가신 분이라 하겠다.


사명 유정이 나이 30세에 서울을 떠나 직지사 주지로 내려가 있을 때 보우스님의 제자 태균太均스님이 스승의 유고遺稿 간행에 도움을 청하자 그 발문에 적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