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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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등불삼아 반야지혜를 구하라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일본 밀교 총본산 고야산 개산 1200주년을 기념해 일본을 방문한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9)는 도쿄와 센다이 쿄토를 거쳐 4월 13~15일 삼일 동안 고야산 승가대학에서 법문을 열었다. 겔룩빠 산하 남걀사원 소속 승려들은 비로자나불 관정의식을 위해 태장계 만다라를 조성했으며, 고야산 승가대학 학장은, “밀교의 가르침에 있어 수승한 스승이신 달라이라마를 모시고 지난 금강승 만다라 봉안에 이어 이번 태장계 만다라 봉안의식이 열리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면서 개회사를 전했다.
이번 고야산 방문이 세 번째인 달라이라마는, “진언밀교를 수행하는 일본 밀교 진언종은 티베트와 함께 정통 밀교를 수행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밀교 종풍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달라이라마는 진언종 종조 홍법대사의 얼이 서린 곤고부지(금강봉사)에 여장을 풀었다. 1200년 전 당나라에서 구법하던 홍법대사는 금강저를 던져 성지를 찾던 중에 헤이안 시대의 이곳 고야산, 마치 여덟 장의 연꽃잎에 둘러싸인 형상의 분지에 자리한 해발 천 미터의 산에 사원 도시를 조성했다. 이후 메이지유신 당시 고야산에 화재가 일어 많은 사찰이 유실되고 재건되면서 오늘의 현대화된 사찰로 자리 잡은 지 200년이 흘렀다. 역사상에서 고야산의 사찰들은 대다수의 일본불교와 달리 권력과 손을 잡지 않았으며 무력 통치에서 벗어난 진언밀교의 정수가 보존된 곳이다. 일본의 순례길 시코쿠 88개 절의 출발점이자 그 종착점으로서 고야산은 2004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달라이라마는 “붓다의 법을 수행하는 도반으로서 이날 법회에 모인 우리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종교의 유래와 인간의 신앙 형태를 아우르며 법문을 시작했다. 이번 달라이라마의 법회 주제는 쫑카빠 대사의 <도차제섭의>와 게쉬 랑리탕빠의 ‘마음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게송’이었으며, 마지막 날은 ‘21세기 청년 불자들의 비전과 윤리’에 관한 공개 강연을 열었다.
달라이라마와 일본 청년불자들과의 공개 만남이 열린 4월 15일, 티베트에서는 2009년 이후 131명 째 분신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정부의 티베트 강제 침략에 항거해 소신공양한 청년 틴레남걀(Thinley Namgyal, 32)은 티베트의 캄 지역 따우 출신으로 사체는 강첼사원으로 이송되어 가족에게 인도 되었다. 다람살라에서는 이날 저녁 촛불 기도 집회가 열렸으며, 인도 다람살라 주재 티베트 망명정부는 4월 18일 남걀사원 쫄라캉 법당에서 추모기도를 열었다.
“달라이라마는 경전 가운데 최상을 무엇으로 보십니까?”
“반야심경입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수행의 차제 그 핵심을 반야심경에 근거해 실천해야 합니다. 공의 지혜로서 연기의 실상을 아는 지혜와 삼라만상의 근본 도리가 모두 반야심경에 담겼습니다.”
“밀교의 탄트라와 성적 에너지는 유사합니까?”
“절대로 밀교의 에너지와 성적 에너지를 혼돈하지 마십시오. 밀교의 에너지는 현교를 통해 들어서는 정광명으로서 기반이 되는 수행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수행이 됩니까?”
“나는 항시 21세기에 걸맞는 불자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지난 30년간 마음과 생명 연구소에서 불교의 철학과 과학을 접목해 대화하는 것도 그러한 목적입니다. 종교는 현대과학과 현대윤리에 부합되어 해석되고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홀로 고요히 기도를 하는 것도 좋은 불교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자는 보다 진취적으로 실천하는 청년정신을 도입해야 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인 불교는 인과를 논합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사유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선을 실천했을 때 그에 대한 과보가 있습니다. 다양한 인간의 근기에 따라 창조주를 인정하는 유신론을 비롯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에는 그 각각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때문에 종교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본인이 신앙하는 종교에 편협적으로 근거하여 나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발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의 역사에서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화와 분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피를 부르는 전쟁의 주범이었으며 경제 교역의 영역에서도 종교의 이상과 본분을 왜곡하고 문제를 조장했습니다. 제가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해 50년 이상을 머물면서 느낀 것은 거의 모든 세계의 주된 종교들이 인도에 정착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확신하건대 인도는 종교의 화합을 조화롭게 이뤄낸 유일한 나라일 것입니다.
서양학자들이 칭하는 티베트불교는 라마교입니다. 이는 잘못된 호칭입니다. 아마도 툴쿠(티베트불교의 환생자로서 영적 스승) 혹은 라마(티베트불교의 스승)라는 측면에서의 티베트불교가 신비롭게 해석된 듯합니다. 티베트불교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호칭이 잘못된 것임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석가모니 붓다의 근본 음성이 쓰인 인도의 경전을 분명히 해석할 수 있는 언어는 티베트어 뿐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나란다의 논서에 주목하는 것은 부처님의 음성에 가장 근접하는 수행도입니다. 나는 항상 21세기의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현대 교육에 기반 한 상식과 윤리를 가지고 불교를 해석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늘의 불자들은 현대의 소양들과 어우러져 불교를 신앙해야 합니다.
대승불교도에게 반야심경은 마음의 양식과 같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로서 깨달음을 향해 정진합니다. 법을 듣는 이는 바른 동기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귀의입니다. 그로서 대승법에 들고자 발심을 합니다. 진정한 귀의처란 무엇인가. 바로 법보입니다. 법이란, 끊을 것을 끊는 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가 되는 번뇌와 무명을 끊은 상태가 바로 멸제입니다. 법이란 본래 우리에게 구족된 것이 아니기에 붓다로부터 그 길을 봅니다. 붓다 역시 인간의 몸을 받은 한 중생이었습니다. 도를 닦음으로서 수승한 경지를 증득한 것입니다. 본래 성자였던 이는 없습니다. 승가는 불법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이들의 결집입니다.
아띠샤 존자께서 처음으로 <보리도등론>을 저술하시고 그 완성은 <보리도차제론(람림)>으로서 정립되었습니다. 붓다의 경율론 삼장은 수행 차제를 아우르지만 그 절정은 티베트불교를 통해 꽃피웠다고 비유합니다. 중광과 유식을 수학하기 위해서는 <입중론>과 <사백송>을 수학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유식사상도 섭렵해야 하며 <보리도차제광론>으로서 수행차제를 수학하고 까담의 주요 맥 역시 수학해야 합니다. 방대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쫑카빠 대사의 보리도 차제 가운데 핵심만 섭렵한 것이 이번 법문의 주제인 <도차제섭의>입니다.
법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의 존재 실상은 ‘공空’이라는 것입니다. 공성은 용수보살과 무착보살에 의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습니다. 연등지이신 아띠샤 존자를 예경하며 삼계에 널리 알려진 용수와 무착의 반야 사상을 찬탄하면서 <도차제섭의>는 펼쳐집니다. <현관장엄론>에서 수행의 씨앗은 발심이라고 하였으며, 최종의 무학도의 지위에 오르는 수행의 경계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선지식 돔된바께서는, “법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요약할 때는 그 핵심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법을 청한 대상의 근기에 적절해야 하며 스승은 제자를 향한 사랑과 이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와 방편은 대승불교의 정수입니다. 허물을 끊고 공덕을 발현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스승을 향한 최상의 공양임을 기억하십시오.
용수보살의 <중관보만론>과 <사백송>에 의하면 해탈을 구하기 위해 지혜로서 번뇌를 대치할 수 있음을 논합니다. 때문에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근간이 되어야 하며 외부의 조건으로서 근처에 선지식이 계셔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춰진 후에야 수승한 법을 만나 비로소 지혜를 증장시킬 수 있습니다. 번뇌의 근본인 무명이 없어졌을 때 이뤄낸 해탈이야 말로 궁극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차제입니다.
유식과 중관의 무아사상을 구분하여 확실히 하십시오. 법집의 미세함마저 타파하기 위해서는 각 학파의 차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왜 붓다의 가르침이 위대한가를 묻는 티베트의 속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수보살께서 붓다의 가르침을 찬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수보살의 수승함을 누가 인정하는가. 나의 스승이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스승을 검증 없이 따르는가. 나는 진리를 반드시 검증하고 따르리라. 그것이 우리 인간 각자가 지성을 지닌 이유이며, 다시 말해 지혜이다.’라고 전해집니다.
불교의 해탈은 내면에서 구현하는 것입니다. 무아의 지혜로서 해탈을 위해 불교의 삼학은 외도의 삼학과 구별됩니다. 무엇이 인간의 몸을 값지게 하는가. 그것이 바로 법수행입니다. 삼세의 부처님은 반야바라밀로써 성불하셨습니다. 일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소지장을 없애야 합니다. 중생의 모든 근기를 알아야만 궁극적인 이타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일체지의 방해 요소는 소지장입니다. 먼저 보리심이 뒷받침이 되어야 공성을 수행할 수 있음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번뇌장의 습기인 소지장을 끊는 방법론은 중관학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공성이 발현된 보리심의 지혜가 바로 반야심경에서 일컫는 반야바라밀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게송’은 보리심을 근간으로 합니다. 삼세제불의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붓다를 성취하라고 타이릅니다. 반야는 지혜이며 바라밀은 궁극의 완성입니다.
공성의 지혜는 두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리심 즉 출리심의 지혜는 번뇌장을 끊어서 아라한과를 이루게 하지만, 반야바라밀의 공성 지혜는 반드시 보리심이 동기가 되어서 구족될 때 번뇌장 그 뿐만 아니라 소지장까지 끊어서 궁극의 지혜를 얻습니다. 번뇌장은 무명이며 윤회의 근본입니다. 소지장은 일체를 앎에 대한 것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근기를 완전히 알아 중생 구제를 위한 완전한 이타행이 준비된 것이 일체 종지이며 붓다의 지혜입니다. 보리심의 지혜만이 공성의 지혜를 구족하기 위한 대치법 임을 기억하십시오. 소지장을 끊으면 일체 종지를 얻습니다. 때문에 보살은 소지장을 끊음에 매진합니다. 그렇다고 번뇌장을 건너뛰고 소지장만 끊으려하면 안됩니다. 번뇌장이 미세하게 남는다면 그것은 윤회의 인이 되기에 반드시 번뇌장부터 끊고 그 후에 소지장을 끊는 것이 차제임을 당부합니다.


일본 고야산에서 가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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