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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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 단지 ‘공空’일뿐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적정을 구하는 성문이여. 일체지를 통하여 적멸에 이를지니
상호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소멸도 발생도 상변도 단변도 오고 감도 없네.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상호 연기의 무자성을 설하신
고타마 석가모니 부처님께 간절한 서원으로 귀의합니다.


세간 유정의 상태는 붓다의 인을 심는 씨앗과 같습니다. 21세기의 불교도라면 이타 중생을 위한 자비와 보리심을 일으켜 이 순간 내 근기가 허락되는 만큼 선근의 뿌리를 올곧게 심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선한 본성은 어느 날 불현 듯 얻어지는 바가 아닙니다. 유년기부터 올바른 경험으로 사유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교육이며 성장을 통해 점차 성숙시켜 가는 것입니다.
불교의 바라밀 행에 입각하여 소유한 것은 어떻게 나눠야 할까요? 본인 달라이라마는 경제론의 개념에 있어서 사회주의 마르크스 사상을 온전히 지지합니다. 이념에 있어 사회주의 사상은 상당히 모범적이고 이상적입니다. 반면 중국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표면적으로는 중국이 공산국가이지만 내부는 변질된 자본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사상적으로 왜곡되어 교육된 개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가 이기적인 마음 씀씀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도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과연 수행의 유익함이란 무엇일까. 바로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보살이라면 지관을 수행하는 목적이 내면의 소지장을 완전히 끊기 위한 것임을 숙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맛보며 육체적으로 즐기더라도 정신적으로 온전하게 건강해야 합니다. 마음이 항시 평온하고 긍정적일 수 있도록 일상에서 수행을 하는 목적이 그것입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종교와 무관합니다. 내면의 가치를 살피고 본연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기 위해 우리는 감정을 조절하는 명상과 같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노력과 애착은 어떻게 분별을 해야 할까요. 타인을 이롭게 함에 있어 그 범위를 잘 살펴야 합니다. 한 예로 어린이의 본성은 순수합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시간을 최대한 할애하여 본성이 사랑임을 각인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최상의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압니다. 그 교감은 상당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8세기 이전 티베트에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티베트는 야만족의 왕국이었습니다. 비로소 불교가 전법이 된 티송데첸 왕권 당시 인도 나란다 승원에서 샨타락시타 승원장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나란다 승원의 논리적 사유 체계를 대중에게 보급시켰습니다. 이후로 선지식과 학승들의 수학에 의해 티베트불교의 꽃은 보리심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티베트불교의 분석적인 논리 체계는 보다 세밀하게 구전이 되었습니다.
불교도의 서원이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일체 괴로움을 내가 감내하고 일체의 유익함이야말로 중생을 위해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변화하는 만큼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육신은 자연의 섭리에 의거하여 유한함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귀한 몸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신중히 헤아려야 합니다. 더불어 나누는 평상심의 평온함이야말로 이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정토의 현현입니다.
매일의 나는 시시각각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무자성과 연민을 사유하고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한의 사랑과 무한의 연민을 일으키는 훈련이 바로 불도입니다. 선지식의 법문을 집중하여 듣고 사유하여 공성의 원리를 면밀히 분석하는 자량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인식론에서 묻습니다. 대상이 없이 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곳 우리의 사바세계는 형색을 보기 때문에 본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보는 것에 보는 행위가 있어 보는 것을 본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보는 것일까요. 바로 보는 자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 하는 것은 본질로서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세습적으로 관습화된 명칭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보는 바와 같이 실제 한다면 본질로써 있어야 하지만 실체는 없습니다. 육처가 공성임을 바로 알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보만론에서 고찰하는 바입니다. 원인에 의존하여 결과를 부정하고 결과에 의존하여 원인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결과가 없는 원인은 없습니다. 일단 존재하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은 허깨비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물방울, 아지랑이는 모두 무자성을 상징합니다. 일체법 역시 공성으로 논증을 하지만 그 공성조차 공함을 동시에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본래 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의 연기 그리고 연기의 공은 동시에 함께 합니다. 연기 한다면 절대 자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색과 공이 다르지 않음이 그것입니다. 정의하는 대상에 본래의 특성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지금 이 시간 이후로 ‘공하다’라는 것이란 상호 연기하는 것임을 사유하는, 실상을 바로 아는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