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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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현대 불교관계 법령과 오늘의 혼란

신규탁
한국선학회 회장


1.
한국이 ‘더 월드 The World’라는 역사대열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일본제국의 조선침입 전후이다. ‘The World’를 일본 학자들이 ‘世界 せかい’로 표기하여 발음했고, 조선인들은 그 표기를 조선의 한자 음가로 옮겨 받아들여 ‘세계’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라는 관념은 서유럽이 자기들 중심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 침입 이전의 조선역사는 ‘天下 Tian Xia’ 속에서 평가되고 기록되어왔다. 물론 조선인들은 그 ‘천하’가 저쪽의 중국대륙에서 만들어진 ‘가치’관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천하’관념 내부에 병존하는 중국 중심적 사고에 대해서도 역시 무관심했다. 왜냐하면 조선의 당시 지식인들, 특히 사대부들에게 저쪽의 ‘중국대륙’은 각 방면에 너무 가까웠다. 그들을 대상화하여 거리를 두고 우리와의 ‘다름(異)’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자기’ 내지는 ‘자신’이라는 반성조차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중화’였던 청국이 일본에게 패전하는 천붕지괴가 조선인들의 목전에 벌어졌다. 1894년 발발한 ‘日淸戰爭, 닛씽센소’가 그것이다. 중국 측에서는 ‘中日甲午..’으로 표기하고, 한국에서는 ‘청일전쟁’으로 표기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쟁도발주체가 일본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조선은, 청국문화의 울타리 속에서 일본문화의 울타리 속으로 재편되기 시작했고, 다시, 일본문화의 울타리 속에서 서유럽문화(미국)의 울타리 속으로 재편되었다. 중국이라는 거울에 반사된 조선에서, 일본이라는 거울에 반사된 조선으로, 다시 서유럽(미국)이라는 거울에 반사된 한국이 현존한다. 현재 한국의 문화와 사상은 세 반사영상의 혼합이다. 타문화의 반사로서 존재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 살며 생각했던 우리 역사가 실존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실존하는 현실을 밝혀내는 업무가 현재 한국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이상이 조선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다. 이런 시각에 입각하여 나는 조선의 불교를 이해하고 있다. 타자에 반사된 조선을 연구하기도 하고, 조선을 비추는 타자를 연구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의 실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나의 이런 시각을 투영시키고 있다.
고려의 불교지식인들이 읽는 책 하나라도, 그것은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자인 당시 중국불교 지성계가 배경에 있다. 고려의 보조 지눌을 연구함에, 당의 규봉 종밀과 이통현 장자, 그리고 오대의 영명 연수, 남송의 대혜 종고, 이들 중국불교 사상가의 불교사상이라는 지식 배경을 제외하고는 언급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점은 조선 유학도 예외는 아니다. 남송대의 주희의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퇴계와 율곡을 운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상은 물론 법률체계를 비롯한 ‘나라’의 운영 시스템 방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나라’의 시스템 위에서 사상도 종교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종교 사상 등등 이런 구체적 사안들의 움직임이 ‘나라’의 시스템으로 문서화되었다고 설명해도 무방하다.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불교 관계법령을 먼저 조사하는 필자의 연구 태도도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현실이 그러니 법조문으로 그 현실을 성문화한 것이고, 성문화된 법조문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변증이다.
근대 이전의 조선에 적용되는 최고 법령은 『경국대전』이었다. 물론 조선은 『대명률』도 준용하였다. 『경국대전』의 <도승> 및 <도첩식>에 의하면, 선종과 교종만이 법령으로 보호 인정되었다. 선종 승과 지원자는 『선문염송』을, 교종 승과 지원자 『화엄경』을 각각 학습해야 했다. 이런 법률적인 환경 속에서, 조선의 고급 승려들은 『선문염송』과 『화엄경』은 물론 그와 관련된 각종 주석서 등을 연구해야 했다. 물론 ‘고급과정’의 이 두 책을 읽기 위한 아래 단계 내지는 예비 단계로서 ‘중급과정’ 내지 ‘초급과정’의 교재를 학습해야 했다.


3.
승려교육기관의 일종인 ‘강원’의 교육과정의 중심에 위의 ‘고급과정’에 해당하는 2종 서적이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중급과정’과 ‘초급과정’에 해당하는 교재들도 편입된다. 이런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고, 1994년 조계종 ‘개혁종단’이 출범하기 이전까지 명목은 지속되었다. 1994년 ‘개혁종단’ 이후에는 봉선사능엄승가대학원만 이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수학기간은 오년이고 학생정원은 10~15명이다. 그것도 방사 부족을 내세우는 주지들의 항의 때문에, 때로는 수준 미달자들 때문에, 정원을 못 채우기 일쑤이다.
선종과 교종의 양종 체제는 조선말대한제국시기에 해당하는 1902년에 시행된 『국내사찰현행세칙』(총36조)에도 유지되었다. 물론 이 세칙은 명치유신 당시의 일본의 근대적 법령을 차용했다. 즉 조선을 어떻게 해보려고 조선에만 적용한 것이 아니고 일본 내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굳이 하는가 하면, 일본 근대를 시야에 넣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조선불교 연구의 한계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10년 일제강점 직후 1911년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이 반포 시행되었다. 근대법령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경국대전』과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승려의 인사권이 승단 외부에 존재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조판서에서 조선총독으로 행정 주무관이 바뀌었을 뿐이다. 일본 국내의 종교정책 변화는 조선총독부에도 직접 영향을 끼쳤다. 1936년(소화11년)에 일본국내에서 발표된 「사원규칙」 제9조와 제10조의 ‘단신도’ 관련 규정은 일본불교의 조선포교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일제 치하 조선의 선교 양종 체계는 점차 퇴색되어 갔다. 일본의 일련종, 정토진종 등이 점점 교세를 확장해갔다.
1945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일본군 무장해제의 명분으로 38선 이남에 미군이 주둔했다. 3년간 미군군정이 시행되었는데, 이 기간 중에는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각종 법령을 차용했지만, 세세한 시행은 여전히 조선총독부 시절 제정된 각종 법령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1948년 8월 한반도 남단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현대의 이념이 불교계에도 도입되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적 법령과 미군 군정청에 의해 도입된 미국의 현대적 법령이 뒤섞이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4.
1949년 6월에 「농지개혁법」이 발표되었다.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승려들이 관리하던 불교 관계의 토지와 임야는 상당수 몰수되었다. 궁여지책으로 1953년 7월 「사찰자경농지사정요령」이 공표되었지만 실효성도 현실성도 부족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승려 1인당 200평의 전답을 그 승려의 소속사원에 귀속시켰다. 물론 해당 사원의 2km 반경 이내의 전답에 한정하였다. 불상 1위를, 승려 1인으로, 상계하여 전답과 임야를 확보한 절도 있었다. 사하촌의 전답들은 이렇게 저렇게 세상으로 흘러나갔다.
설상가상으로, 1954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일제청산의 명분을 제시하여 ‘대처승은 사찰에서 퇴각하라’는 취지의 ‘유시’를 발표한다. 불교재산권 분쟁은 법정으로 확산되었고, 결과적으로 불교교단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총 400여 개의 종단이 난립한다. 물론 유력종단은 조계종, 태고종, 관음종, 진각종 정도이다.
4.19 의거로 이승만 독재정권은 물러갔다.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틈을 타 1962년 박정희 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여 「불교재산관리법」을 공표한다. 제6조에 의하면, “불교단체는 내각의 명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문화공보부에 등록해야 한다.” 9조 2항에 의하면, “불교단체의 주지와 대표임원이 취임하였을 경우에는 지체 없이 문화공보부장관에게 등록하여야 한다.” 등록의 수락여부는 전적으로 장관의 재량에 의존한다. 이런 정치적 역학구조 때문에 불교 교단의 자주권은 축소되고, 정권과 결탁하는 정치승려들은 증가하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987년 11월 「전통사찰보존법」으로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은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 2009년 「전통사찰보존급지원법령」을 재개정 반포했다.
봉건-근대-현대라는 역사무대 위에서, 불교를 관리하는 각종 법령들의 역할은 공과를 모두 남겼다. ‘공’은 불교재산보호였고, ‘과’는 정교야합이었다. 이런 법령이 없었더라면 전래의 불교 부동산은 많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이런 법령의 허점을 이용해서 지금도 절 땅을 팔아먹다 들킨 일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시대와 왜정시대 공권력으로 관리하던 불교재산(토지, 임야, 건축, 각종문화재, 서적 등)의 ‘소유권’을 비롯하여 ‘관리권’ 더 나아가 ‘사용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한국의 현대 불교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최근의 조계종의 소란도 나는 이 문제 해결에서 드러나는 각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