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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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김명환
불광출판사 제작부장


한국불교 1,600년, 그 명과 암을 솔직하게 그려낸
역사가 이이화의 쉽고 재미있는 불교사 이야기!
한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 하나가 있다. 바로 불교사이다. 불교는 고대 고구려에 처음 전래되어 백제, 신라, 가야에 전해졌고, 고려, 조선에 이어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불교사에 대한 시각은 주로 사상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춰져왔다는 점, 그리고 학술적인 측면으로 다루어져왔다는 점으로 인해 대중들이 접근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가 지나온 유구한 세월을 이 책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역사적 실체로서 불교를 바라보다
이 책은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재야학자” 이이화의 저서이다. 저자는 우리 불교사를 한국사 전체의 틀에서 통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특유의 이야기체로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동안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불교사를 한층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일반 역사물에 있어 불교는 단독의 주제로 다루어지기 쉽지 않았다. 몇몇 대표적인 인물, 혹은 현존하는 문화재(유물)에 대한 서술 등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한국불교사를 단독의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역사물도 대부분은 사상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결국 우리는 불교를 역사적 맥락의 종합적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일반의 역사에서 따로 떨어진 존재로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불교사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불교는 우리 역사 속에서 문화와 사상의 측면은 물론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불교가 걸어온 길은 한국사 번외의 맥락으로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이 책 전체에 포진해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저자는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흐름 속에서 불교사를 조명한다. 그리하여 불교사의 명과 암을 꾸밈없이 서술해나간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한국불교사의 민낯
불교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을 아주 일반적인 경우의 예 몇 가지로 살펴보자.
고대 삼국시대의 불교는 모든 계층이 섬기는 국가 종교이자 통치 이념으로 작동하며 강력한 왕권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결정적인 도구로 이용되었다. 일련의 흐름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원동력이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고려시대 3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몽골과의 혹독한 전쟁에서도 민심을 모으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는 불교의 힘이 컸다. 그 증거가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한편 억불의 기치 속에서도 왜란 당시 승군의 활동상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유정은 전쟁 이후에도 외교사절로 활동하며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왕실에서 이러한 점을 높이 사 해남 대흥사에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고 제향하게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불교사에 이와 같이 빛나는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는 역사 속에서 부패와 정화를 반복했고, 존경과 핍박을 번갈아 받아왔으며, 시대에 참여하기도 시대를 외면하기도 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빛에 가려져 알 수 없었던 어두운 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불교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한 가지는 고려 말 정치가들의 상소문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유학자인 당시 정치가들이 불교 배척 상소를 올린 것은 불교를 이단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상소에는 당시 불교계의 부패상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절에 하사된 토지의 도조나 노비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고, 귀족들과 뇌물을 주고받기도 하며, 일반 사회의 풍속을 해치는 등 상소문에 열거된 불교계의 부패상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또한 고려의 어느 시기, 귀족 세력의 재산 도피처로 절이 이용되었다는 점 또한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맥락 중 하나이다.
한편 불교가 핍박을 받았던 것은 비단 조선시대의 일만이 아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고려 무신정변으로 권력이 무신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종敎宗 세력들이 정권에 반기를 들게 되는데, 승려들의 무력 대항은 번번이 실패로 이어졌고, 일련의 한 사건으로 인해 고려 희종은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기도 한다. 결국 오랜 세월 맥을 이어온 교종 세력은 무신정권에 의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불교사의 어두운 면 중 하나이다.


역사가 이이화가 들려주는 한국불교사의 거의 모든 장면
지난 2002년 출간되어 현재는 절판된 『역사 속의 한국불교』를 수정·보완하고 새 옷을 입혀 다시 출간한 이 책은 역사교양서 중 거의 유일하게 불교사를 조명한 도서로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1,600여 년 역사를 편년체의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 또한 불교의 명과 암을 꾸밈없이 제시하면서 한국사와 따로 떼어 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불교를 우리 역사의 실체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발견되어야 할 또 다른 점은 저자가 그동안 모든 방면에서 일정하게 유지해온 신념이자 역사관이 전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대승불교의 ‘중생 제도’이다. 독자들은 그동안 민중의 삶에 깊은 애착을 지녀온 저자의 역사관으로부터 불교사 속의 명과 암이 더욱 명확해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 말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과거를 반성하는 자료의 하나로 쓰였다.” 이 말은 저자가 그동안 간직해온 불교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화쟁과 총화 등 찬란한 정신 유산을 이어오며 지금까지도 역사의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한국불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깊고 진심어린 조언이기도 하다.
이제 불교사를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일 시간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근인近因을 종교 혹은 신앙이라는 이유로 따로 떼어 놓게 된다면 우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일에 이 책은 매우 유용한 교양서가 되어 줄 것이다.


책속으로
그런데 고구려는 왜 불법을 아무 저항 없이 수용했을까? 열렬한 불교도이자 강력한 힘을 가진
부견에게 잘 보이려는 몸짓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부처님이 가르친 중생 제도 같은 자비사상을 전파하려는 목적이었을까? 여기에는 더 큰 목적이 따로 있었다고 볼 정황 증거가 많다.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 24쪽


도림은 바둑을 잘 두었는데 개로왕도 정사를 밀쳐놓고 바둑 놀이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바둑으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도림은 개로왕에게 “백제는 천혜의 요새를 차지하고 있으나 성곽이 제대로 보수되지 않았고 궁궐이 퇴락하여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은근히 말했다. 개로왕은 이 건의에 따라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시켰다. 도림이 도망쳐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개로왕은 포로로 잡혀 한강가의 아차산성에서 처형되었다. - 35쪽


백제 사회를 정토의 터전으로 여기게 하고 무왕 자신이 미륵불의 도움을 받았거나 자신이 현세한 미륵이라는 암시를 풍겨,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현세의 희망을 주고 일체감을 다지며 귀족들을 억눌러 절대 왕권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59쪽


이렇게 해서 이차돈은 형장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처님이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외쳤다. 이윽고 그의 목을 칼로 내리치자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발 높이 솟았고 머리는 북쪽으로 날아가 경주 외곽에 있는 금강산 정상에 떨어졌다 한다. 또 햇빛이 사라져 갑자기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묘화妙花가 쏟아져 내렸으며 땅이 크게 울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도 움직였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두려움에 떨며 서로 마주서서 곡을 했다. 길에는 통곡 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 - 70쪽


의상은 원효와 헤어진 뒤 661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조국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어 당나라와 연합해 1차 평양 공격에 나섰다. 장안도 고구려 정벌로 소란스러웠다. 의상은 고국의 소식에 귀를 막았을 것이다. - 104쪽


정토신앙은 귀족과 노비에게도 유행을 탔다. 현세에서 부귀를 누리는 귀족들은 죽어서도 극락세계에 가서 영화로운 삶을 연장하고 싶었을 것이요, 노비들은 현세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 내세에는 극락세계에서 잘살아보겠다는 염원으로 아미타불을 신봉했다. - 115쪽


왕실과 귀족의 타락과 갈등으로 지방 호족은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민중도 민활하게 움직였다. 화엄학을 닦는 승려들은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왕실과 귀족들의 손가락질에 놀아나 어용으로 전락했으며 정토신앙과 관음신앙도 민중과 유리되었다. 이런 승려들은 중생 구제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잿밥에만 마음을 쏟아 평민 위에 군림했다. 선종은 이런 시대 분위기를 타고 일어났다. - 132쪽


고려 창건의 지배 세력은 도선을 철저히 이용했다. (…) 풍수설이 새 유행을 타는 분위기에서 이에 대한 그의 지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신라 왕실에서 먼저 그를 초청했을 때 왕건은 보물을 놓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남쪽의 호족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도선의 이미지는 이용 가치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선을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설파한 술승으로 만들어나갔던 게 아닐까? - 164쪽


원나라 지배 시기에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팔을 그 위에 얹어 편안한 자세를 취한 관음보살상도 등장했다. 이 부처는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구슬 목걸이를 둘렀다. 얼굴 생김새와 몸체, 옷의 매듭이 티베트 양식과 닮은 불상도 있다. - 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