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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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주上無住 가는 길


김명환
불광출판사 제작부장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가 김홍희의
암자기행 산문집이자 흑백사진 화보집


사진가 김홍희, 90년대 중반 「중앙일보」에 ‘암자로 가는 길’ 연재 이후 23년 만에 다시 암자를 찾아, 그 여정을 기록한 책. 작심하고 2년에 걸쳐 혼자 모터사이클을 이용하여 오른 암자 26곳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무, 바위, 돌, 물, 하늘…, 그리고 스님. 매번 같은 풍경으로 펼쳐지는 암자를 오르고 또 오른 그는 어느 순간 더 위로 머무를 곳 없는 무상無上의 땅 ‘상무주上無住’에 올라섰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모든 것이 정지된, 마치 돌처럼 흐르는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갑작스레 찾아든 암세포를 치유하고, 오랫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우울을 털어냈다. 그 치유의 풍경과 시간들을 오롯이 책에 담아낸 작가는 말한다.


“빛과 그림자 사이, 길과 길 없는 길 사이”
더 이상 갈 수 없는 가장 높고 고귀한 곳,
그곳이 바로 상무주上無住!


‘글 쓰는 사진가’ 김홍희는 스테디셀러 『암자로 가는 길』을 비롯해, 현각 스님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 조용헌의 『방외지사』 등에 사진을 실었고, 저서 『나는 사진이다』, 『방랑』,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등을 통해 사진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잘 알려진 사진가다. 그는 늘 새롭고 획기적인 화각畵角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독특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며, 철학이 깃든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사진가로서 30회 가까운 개인전을 치렀고, 오롯이 부산에 거주하며 「국제신문」의 ‘세상 읽기’ 칼럼을 올해로 만 7년째 연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사진만큼 솔직하고 거침없는 입담으로도 유명하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재담과 훈훈한 인상을 시청자들에게 남기기도 했다. KBS <명작 스캔들>의 MC, EBS <세계테마기행> 볼리비아, 짐바브웨, 인도네시아 편, 부산 MBC <포토에세이 골목>, 채널 T <김홍희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10부작 등에 출연했다.
이 책 『상무주 가는 길』은 전업 사진가로서, 작가와 방송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해온 인간 김홍희의 결정체로, 그의 인생과 철학, 예술 세계가 응집되어 있다. 인연은 신비롭다. 정신없이 바쁘게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좇아 암자를 오르기 시작했다.
23년 전 사진을 찍었던 그때 그 암자들은 거짓말처럼 그대로였다. 나무, 바위, 돌, 물, 하늘…, 그리고 스님. 전국 방방곡곡의 암자 수십 군데를 오르고 오른 뒤 그는 무언無言의 경지를 만났다. 그가 일생 매달려온, 그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카메라도 버리고 남은 한 자루의 펜도 버릴 수 있는 ‘무상無想의 마음’과 마주한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육신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대장암과 우울증에서 말끔히 벗어날 수 있었다. 암자가 있는 곳, 더 이상 갈 수 없는 가장 높고 고귀한 곳, 그곳 상무주에서 받은 가피이자 영험이다.


암자에서
부처도 만나고 예수도 만나다


이 책은 전국 26곳 암자의 풍광을 담아냈다. 김홍희 사진가 특유의 번뜩이는 글과 함께 세심한 감성으로 포착한 100여 컷의 흑백사진을 실었다. 고집스런 사진가 정신, 장인의 뚝심이 느껴지는 사진들이다. 글은 글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배치했다. 글과 사진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 절묘한 조화를 빚어낸다. 읽는 맛이 보는 맛을 돋우고, 보는 맛이 읽는 맛을 부른다. 어느 페이지를 먼저 열고 보더라도 자연스럽게 ‘상무주를 향한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흑백사진은 돌처럼 천천히 흐르는 암자의 시간을 형상화하며 가슴 깊이 진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추억을 쓰다듬고 아픔을 건드리면서도 진정한 위안의 손길을 내민다. 세상살이의 시름을 딛고 다시 저잣거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안겨준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며 한층 풍요롭고 성숙한 삶으로 안내해준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듯한 돌 같은 흑백의 풍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 올라보지 않겠는가?
상무주, 그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구원의 땅!”


책속으로


『상무주 가는 길』을 구상하며 ‘읽는 책’인 동시에 ‘보는 책’을 추구했다. 그만큼 사진의 양과 질에 많이 치중했다. 그리고 순서 없이 눈을 끄는 사진이 있는 곳에서 호흡을 멈추고 책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그런 곳이 앞이거나 뒤거나 중간이거나 상관없게 했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 책을 들고 현장에 가서 같은 화각으로 암자 찍는 연습을 해볼 것을 권한다. 교과서적인 화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찍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지도 모른다. -7쪽


대화 내용인즉 피천득 선생이 법정 스님께 “저기 대나무 숲 입구가 참 마음에 듭니다”고 하니 법정 스님이 “가지고 가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형을 무형으로 바꾸기, 젊은 나이였지만 이 대화 내용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았다. 물질을 마음으로 단숨에 바꾸어 태산같이 크고 무거운 것도 거저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어른들의 대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23쪽


암자는 가공하지 않은 다이아몬드처럼 숨어있는 듯하지만 실은 가공한 다이아몬드를 숨겨두는 곳이기도 하다. 알려진 암자의 알려진 암주를 만나러가는 즐거움도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쉬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암자를 찾을 때의 기쁨도 크다. -48쪽


눈이 나뭇가지에서 얼었다 녹으면서 수정알 같은 물방울이 역광에 빛나고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더니 이건 꿩 대신 봉황을 만난 격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망으로 어깨가 늘어졌지만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을 보는 순간 카메라의 셔터는 수도 없이 끊어졌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 같은 필부는 빵만이 아니라 한 방울의 빛으로 넉넉한 삶의 풍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60쪽


힘겹게 올라온 잔설 쌓인 오르막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잘 내려가기. 미끄러지지 않고 잘 내려가는 것도 이 길을 올라왔다 내려가는 중에 해야 할 공부다. 그렇지만 산을 다 내려와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했던 그 생각이 산길에서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도무지 없다는 결론이 났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럴 때는 발끝으로 하는구나. -117쪽


거기에는 바위와 돌덩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모든 바위와 돌덩이가 하나같이 능선을 타고 암자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부처가 되려고 상선암에 왔다가 사람도 못 되고 부처도 되지 못한 채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 인연들로 보였다. 울어도 울 수 없고 기어오르고 싶어도 기어오를 수 없는 몸을 가진 바위와 돌덩이들이었다. -151쪽


방에는 스님 외에 대여섯 명의 객이 앉아있었다. 스님께 가볍게 인사하고 상무주암에 23년 만에 찾아왔다고 하니, 객 중 하나가 부부처럼 보이는 두 분을 가리키며 30년 만에 상무주암에 오신 분들이라고 소개를 했다.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도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진정한 암자일 것이다. 풍광이 좋아 다시 찾을 수도 있고 암주를 흠모해 다시 올 수도 있다. 가슴 한편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남기는 곳. 다시 와도 변함이 없는 곳. 그런 곳을 꿈꾸며 나는 다시 가고 싶은 암자를 순례하고 있다. 그것이 검은 감자 한 쪽의 기억일지라도. -178쪽


‘철퍼덕’ 셔터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웃는 모습도 찍고 미소 짓는 모습도 찍고 화난 얼굴도 찍고 무표정한 얼굴도 찍었다. 이 모든 모습을 담은 얼굴을 찍어야 할 차례다. 표정 전의 표정을 찍어야 한다. 가히 8세기 신라의 장인은 그 모습을 어떻게 돌 속에 담았을까?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나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가장 필부의 모습으로 담았다. -196쪽


가을은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성전암의 그림자는 짙어질 대로 짙다. 누군가를 다시 찾아왔을 때 만나지 못하는 허전함은 말로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 생 영영토록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성전암의 그림자만 한껏 찍고 팔공산을 내려가는 길. 매미 소리 대신 바람에 실리는 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는 뭐하는 사람이고?” -220쪽


내가 사는 집은 부산이지만 가끔 스님을 뵙고 싶으면 멀리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으로 갔다. 부산서 가는 자재암 길은 말 그대로 천 리 길이다. 무엇을 바라거나 원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을 뿐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사람을 편하게 하고 함께 있는 것으로 위로하는 분들이 있다. -254쪽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면서 세월이 바뀐다. 그러나 암자는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단정하든 정갈하든 삶을 줄이는 것이다. 버릴 것이 없는 곳. 다 버린 곳.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곳. 이쯤 되어야 암자다. -282쪽


암자마다 인연이 따로 있는 듯하다. 다시 가고 싶은 암자는 뭔가 마음의 짐을 진 곳이다. 갚을 것이 있는 암자는 반드시 다시 가게 된다. 못 갚게 되면 내생에 갚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 세상에 온 이상 다 갚고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 다시 가게 된다. 현생을 내생으로 미루지 말기. 이게 공부 아닐까. -304쪽


햇살은 그렇게 온 산에서 반짝이며 천둥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있었다. 관음암으로 가는 산길에 한 발은 빛을 또 한 발은 그림자를 밟으며 오르도록 푸른 햇살이 나무 사이로 쉼 없이 쏟아졌다. 멀리 삼화사 국행수륙대재의 북소리와 범패 소리에 가을 국화가 흔들리며 나를 맞아줄 때, 나도 가을도 어느새 관음암 마당 앞에 당도해있었다. -3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