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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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의 불법佛法을 계승하다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에게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가 있었다면, 청허 휴정에게는 편양 언기가 있었다. 신회는 그의 스승 혜능을 선종禪宗의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로 만들었던 인물이다. 스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 선종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요컨대 달마를 시조로 하는 선종의 확립은 신회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편양 언기 역시 임제 태고臨濟太古 법통설의 정비 등 교단의 내실을 기했다. 무엇보다도 스승 청허의 사상을 본받아 선·교·염불의 삼문수업三門修業 체계를 정비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청허가 입적한 후 편양을 비롯한 그의 문도들이 금강산과 묘향산을 비롯한 팔도의 명산대천에서 활동하면서 청허의 유훈遺訓을 널리 전하고 조선불교계에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편양은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호가 ‘편양’이고, 휘가 ‘언기’이다. 11세에 출가해 청허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계를 받았고, 장성해서는 묘향산妙香山에 머물던 청허의 문하에서 심법心法을 얻었다. 그 후 여러 스승을 찾아 의심을 끊었고, ??화엄경華嚴經??을 중심으로 한 대승 교학을 깊이 탐구하여 그 학업이 막히는 곳이 없었다.


타고난 자질이 단순하고 원대하여 언제나 고요히 침묵하였고, 예리함을 밖으로 거두고 신명神明을 안으로 비추며 빼어난 기운이 눈썹과 눈썹 사이에 조금 드러나 있었다. 세속 일을 하거나 법좌法座에 올라도 사람과 더불어 차별함이 없고 말씀은 맑고 간편하여 한마디로 이치를 분석하니, 목마른 자가 강물을 마신듯하고, 허虛로 나갔다가 실實로 돌아가곤 하였다. 또 가려서 버리는 것으로 시詩와 문文을 하였는데, 잡스러움을 뽑아버리고 기틀을 새롭게 함이 붓을 잡고 얽어서 한때 이름을 구하려는 자가 갑자기 얻어서 그 길고 짧음을 견줄 바가 못 되니 역시 그 하늘에서 받은 것이 온전함을 볼 수 있다.
-??편양당집?? 서문 중에서-


편양과 친분이 두터웠던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1589~1670)가 묘사한 편양의 사람됨이다. 성품이 단순하고 침묵했으며, 예리함과 신명을 안으로 감추었다고 한다. 또한 사람을 대함에 안과 밖이 없었고, 단순명료하게 이치를 분석하니 따르는 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문은 안과 밖을 화려하게 꾸미기 보다는 잡스러움을 뽑아버리는데 유용했다. 이와 같은 수행자로서 그의 면모는 60년 차이가 나는 스승 청허 휴정을 닮아가고 있었고, 청허가 입적하고 난 이후에는 조선불교의 현실을 걱정하고, 청사진을 그렸던 유훈遺訓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오직 서산西山이 미친 물결을 잠재우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는 힘을 발휘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뼈대를 바꾸는 영방靈方이요, 눈의 백태를 긁어내는 금비金?라고 할 만하였다. 선교禪敎가 어수선하게 뒤섞임에 옥석玉石을 구분하여 가르고, 보검을 휘둘러서 칼날을 감히 범하지 못하게 하고, 입을 다물고 정관靜觀하며 불 꺼진 재처럼 되지 않게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인가. 설활殺活의 겸추鉗鎚를 손에 쥐고서 많은 영재를 길러내고, 불조佛祖의 광명을 새로 밝혀 인천人天의 안목을 열어준 것이 이처럼 성대한 때는 있지 않았다.
-편양의 ?서산행적초西山行蹟草? 중에서-


편양이 정리한 청허의 행장 가운데 일부분이다. 불교 탄압과 소외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기도 어려웠고, 종파들끼리 우월을 다투다 해가 저물기 일쑤였다. 더욱이 조정과 신료의 수탈과 착취로 절집의 살림살이는 매우 곤궁했다. 편양은 이 무질서한 불교계의 상황을 스승인 청허가 정리하고자 기초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수선하게 뒤섞인 선교禪敎를 옥석을 구분하여 가르고 사실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는 눈의 백태를 금 칼로 긁어냈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인재를 길러 침체에 빠져있는 불교계의 기초를 확립하고 교단의 안정을 기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양의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다. 청허가 그 기초를 수립했다면 편양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어 조선불교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조선불교계에 편양 언기가 없었다면 조선불교의 사상과 수행체계, 그리고 신앙은 정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편양은 청허의 유훈대로 사상과 수행체계를 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정했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려 팔도로 퍼져나가게 하였다.


유정이 행장을 지으니 선사께서 입적하던 날 제자에게 유촉하기를 “지금 내가 적멸한 뒤에 의발衣鉢을 호남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大芚寺, 대흥사)로 옮겨 기일忌日날 제사를 지내라. 두륜산이 비록 한쪽에 치우쳐있어 명산은 아니지만, 삼절三絶을 가지고 있기에 귀중하게 여긴다. 그 하나는 기이한 꽃과 풀이 계절마다 광경光景을 이루고 직물과 곡식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고, 북쪽에는 하늘의 기둥을 지탱하고 있는 월출산이 있고, 남쪽에는 지축支軸을 굳건하게 맺고 있는 달마산達摩山이 있다. 동쪽의 천관산天冠山과 서쪽의 선은산仙隱山은 우뚝 서서 서로 상대하고 있으며, 바다와 산이 둘러싸고 있고 동부洞府가 깊고 멀어 만세토록 헐어 깨트릴 수 없는 땅이다. 또 하나는 천리나 떨어진 곳이라 왕의 덕화가 늦고 빠름을 가릴 것 없이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늘 아래 왕토王土 아닌 곳이 없다. 나라를 향한 충성을 일으키기 어려워서 큰 공적을 내세울만한 것은 없다. 성주聖主의 깊은 은혜를 이로 인해 감동한다면 후세에 어찌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어리석은 풍속을 깨우칠 자가 없겠는가. 또 하나는 처영處英과 여러 제자들이 남방南方에 있다. 내가 처음 출가할 때 서로가 불법佛法은 두류에서 들었으니 이곳을 종통宗統으로 삼는 것이 도리어 귀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은 유촉遺囑을 거스르지 말고 나의 의발과 성상께서 하사하신 대선사교지大禪師敎旨를 두륜산에 옮겨 보관하고 입적한 날에는 제사를 제자들이 주관케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대둔사지??, ?사표충사액단자賜額表忠單子? 중에서-


청허가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대흥사의 가치다. 예컨대 대흥사는 풍광이 빼어나고 만세토록 영원할 땅이며, 어리석은 속인을 경계할 만한 땅이고,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이고 보존될 곳이라는 것이다. 청허의 이 유언이 계기가 되어 팔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대흥사는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면서 사세는 물론이고 그 위상이 조선불교를 상징하는 종원宗院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