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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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 의지하니 붓다의 화현과 다를 바 없어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12월 10일은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7)의 노벨평화상 수상 23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기념식을 하루 앞 둔 12월 9일, 티베트의 분신은 급기야 95명에 이르렀다. 지난 11월 2일 유엔(UN)의 인권 수석 나비필라이(Navi Pillay)가 티베트 사태에 대한 인권선언문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파만파였다.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중국 정부에 항의 성명을 냈지만 중국 외교부는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일축했다. 티베트인들이 부르짖는 ‘종교의 자유’와 ‘달라이라마의 티베트 귀환’이 2009년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근본 적인 이유와 그들이 분신으로서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원인을 다시 한 번 통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와 같은 지혜를 지닌 스승’
‘달라이라마’는 몽고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라마(소남갸초, 1543-1588)에게 봉헌한 이름이다.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7)는 1979년에 처음 몽고를 방문한 바 있다. 달라이라마는 몽고 불자들의 권청으로 법회를 열며, 당시 몽고는 중국의 체제하에 있었기에 냉전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음을 회상했다. 티베트와 몽고가 맺어온 수백 년의 교류와 더불어 근래 인터넷 사이트 개설을 통한 양국의 진보적인 협력 체제 강화를 격려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20~21일 양일간 개최된 다람살라법회에서는 3대 달라이라마의 <람림> 주석서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정제된 금의 본질(Essence of Refined Gold)>을 주제로 했다. 쫑카파의 <람림> 소론 가운데, <보리도차제광론>의 게송에 대한 주석이다. 보리도 차제의 소론인 이 <정제된 금>의 법맥은 쿠누에 계셨던 게쉬 린첸 뗀바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청정하고 지극한 동기를 세우십시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불법승 삼보에게 귀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분석과 통찰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에 있어서 불교는 막중한 책임과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자와 비불자를 떠나 우리 아시아인에게 불교는 동질한 문화적 민족성의 공감대를 부여합니다.
사랑과 자애 그리고 인욕은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하찮은 벌레조차도 상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자애를 보면 삶의 구도가 지니고 있는 기본 지침이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사랑의 마음은 원래 인간이 지닌 것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어우러져야 하는 지침입니다.
하나의 귀의처에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믿고 따르는 신앙 활동은 좀 더 나에 대한 아집을 줄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다양한 믿음의 형태 가운데 창조주를 따르는 종교에서는 보다 자신을 내려놓음에 있어 불교보다 유연함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불교는 투철하게 나와 마주하게 합니다. 본연의 모습 즉 상일 주재하고 항상 하는 고정된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합니다. 반드시 결과에 합당한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비롯되는 관점을 지닙니다. 지구상의 생명체를 담는 그릇과 같은 세간은 무상합니다. 비로소 연기 즉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열반의 적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과연기가 있습니다. 선한 원인으로서 선한 과보를 받는 원리입니다. 행복의 씨앗을 심어 그에 인한 과실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간의 몸을 받아 삼선도에 낳았으니 궁극의 해탈인 열반으로 향하는 정진의 길에 충실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이 무엇이며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됐는가를 사성제를 통해 묻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12연기의 근원인 무명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무명에도 업과에 무지한 무명과 진여에 무지한 무명으로 구분됩니다.
업과의 무지한 무명은 연기법으로서 환멸 시킬 수 있습니다. 진여에 무지한 무명이란 존재하는 것들이 자성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들어 생각하는 것들이 그와 같이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진여에 무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내가 보는 바와 같이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며 단지 이름이 붙여진 것일 뿐이라고 이해하고 거듭 확신을 얻는다면 ‘나’ 뿐만 아닌 일체가 자성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를 줄여갈 수 있습니다. 진여에 무명하기에 우리는 윤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공성의 견해란 인과의 연기법에 있어서 원인이 결과를 낳음뿐만 아니라 결과가 존재하기에 원인이 상호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만일 존재하는 것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원인과 결과를 결코 성립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자유롭게 독립적인 것으로 반드시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떠한 활동과 작용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원인이 결과를 낳으며 결과 또한 원인에 의존해 존재합니다. 쫑카빠 대사께서는 “서로 상호해 존재하니 매우 희유하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로써 모든 연기법을 보시고 또한 보이신 석가모니 붓다를 찬탄하셨습니다. 원인과 조건의 연기법으로 열 가지 불선업(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이간질, 험담, 잡담, 탐심, 시기심, 그릇된 견해)을 짓지 않으니 다음 생에 삼선도에 낳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르게 생각하는 힘을 얻습니다. 이 힘이 바로 무명을 깨우친 지혜입니다. 복덕이 아닌 것을 먼저 끊으십시오. 이후에는 ‘나’라고 여김을 끊으니 비로소 번뇌장이 소멸되었습니다. 이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끊으니 소지장 역시 끊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몸을 얻은 이생에 이익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일체 종지에 이르도록 하는 존귀한 법이 삼사부의 법을 빌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서원을 세워봅니다. 오늘부터 이행할 보리도의 차제는 역대 스승들께서 이미 걸어가신 길입니다. 삼선취에 낳거나 열반에 이르거나 일체종지를 얻음에 보리도의 차제에는 본질에 그릇됨이 없으며 그 수순에도 차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바른 바탕을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붓다의 법에 근거를 둡니다. 사성제의 법인가, 반야부의 법인가, 삼성을 말하는 부분별지의 법인가를 헤아려 봐야 합니다. ‘나’라고 집착함을 멸함에 마음의 진여를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야부의 견해를 필요로 합니다. 더욱이 금강승 수행자는 반야부를 깨우쳐야 합니다. 법을 논함에 ‘현관공성’과 ‘은희차제’로 구분합니다. 보리도 차제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스승에 의지함이며 궁극에는 지관쌍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엄경론>에 준하여, 계행으로서 자신을 점검하십시오. 따라서 적정에 이르면 비로소 지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스승 또한 법맥에 있어서도 풍족해야 해며 수행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쌓아 제자를 가르침에 항시 자비심을 내어 즐겁게 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불교를 바르게 믿고 행함에 길잡이가 되는 스승이 있습니까? 제자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스승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높은 법상에 앉아 있다고 하여 훌륭한 스승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며, 생계를 잇기 위한 목적으로 법을 설하는 곳에 포섭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란다승원의 법통을 잇는 티베트불교 수행자라면 마음의 평등심으로 바른 법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붓다의 법인 불요의와 요의를 구분하여 받아들임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또한 진제와 속제의 가르침을 긴밀히 분석해야 합니다. 불교를 수행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 다스림으로써 바른 법을 수행하고자 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른 법을 구함에 스승에 의지하기에 제자는 항시 공경의 마음을 내야 합니다.
수행에 들어서며 깨달음의 성취가 있기 위해서는 참회와 공덕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칠지작법을 이야기 합니다. 정례지頂禮支, 공양지供養支, 참회지懺悔支, 수희지隨喜支, 권청법지勸請法支,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회향지回向支가 바로 그것입니다. 각각의 지는 간단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법계의 스승들께 절을 올리며 예경을 올리고, 향과 꽃 등의 공양을 올립니다. 이어서 탐 진 치 삼독에 대한 참회를 하고, 시방에 계신 스승의 공덕에 수희하며 동참하고자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붓다에게 법을 청함에 항상 중생과 같이하기를 권청하여, 이 수행 기도의 공덕으로 쌓은 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할 것을 다짐합니다.
먼저 자신이 머무는 방에 모신 삼보를 청정히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면전에 차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극한 마음으로 중생을 위하는 삼귀의와 사무량심을 상기하십시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자성으로부터 공하며 공성 그 자체에서 여덟 마리의 사자 위에 모셔진 연꽃과 달의 방석위에 붓다께서 계심을 관해봅니다.
“옴 쑴바 와.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를.”
스승에게 의지함에 있어서 분석하는 명상으로서 서서히 마음을 길들여갑니다. 수행이란 몸과 말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바꾸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입니다. 법이란 마음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물을 들여야 합니다.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omflower@gagyo.org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