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1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특별기고
    새해칼럼
    다람살라소식
    지혜의 샘
    불교와 탱화
    금강계단
    불서
    절문밖 풍경소리
    경전이야기
    즐거움을 뿌려라
    영어로 배우는 법구경
    건강한 생활
    불교설화

과월호보기

행복 3제

승한 스님
봉담선원장


1. 불교, 내 생의 감로수
내 오른쪽 손목엔 항상 염주(수단주)가 끼워져 있다. 내가 승려여서가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오른쪽 손목을 빙 감고 돌아간 한 알 한 알의 염주를 헤아려보며 내 삶과 마음의 경책으로 삼기 위해서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내가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건 고 3때의 일이다. 청춘의 지독한 늪에 빠져 온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내 한 어깨에 다 짊어지고 허우적거리던 그 해 봄, 나는 한 움큼의 흰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죽었다, 20일 동안. 그리고 마침내 한줌의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어느 날, 나는 왼쪽 팔뚝에 링거를 꽂은 채 다시 이승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퇴원 길로 학교를 그만 둔 나는 산으로 갔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덕유산 용추사. 그리고 6개월간의 행자 생활. 불교와 나의 첫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그러나 내 팔자는 사나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중이 될 팔자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0년 뒤. 30대 중반이 지나서 나는 다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80년대의 험난한 시대를 술과 뜨거움 하나로 관통해오던 나의 영혼은 지칠 대로 지치고 피폐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다. 6개월간의 병상 생활. 그 기간 동안 나는 삶의 방패막이 삼아 기독교와 천주교, 제 3의 종교 등 많은 종교를 편력했다. 그러나 그 어느 종교도 내 침울한 영혼을 쉬게 해주지 못했다. 기어코 나는 죽고만 싶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방랑 끝에, 불교, 그 인연의 필연이 나를 다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와타나베 쇼코가 쓰고 법정 스님이 옮긴 ‘불타 석가모니’라는 책을 떨리는 가슴으로 다시 읽었다. 그 속엔 그 책을 처음 접했던 20대 때 맛볼 수 없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깊은 세계가 장장마다 석류알처럼 알알이 배어있었다. 정말 나는 부처님을 향한 티끌 같은 인연 하나 때문에 생명의 감로수를 마시고 다시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기어코 다시 승려가 된 것도 결국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맺어진 불교와의 인연 때문이다. 절은 꼭 깊숙한 산중에 있는 절이 아니어도 좋다. 추운 이 겨울, 많은 분들이 절집 담장 너머로 은은히 들려오는 쇠북소리와 목탁소리를 만나 한없이 맑고 따뜻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길 바란다.
                               
2. 독배명상
얼마 전에 ‘동사섭同事攝 법회’라는 영성 수련회를 다녀왔다.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행복마을’의 용타 스님과 전북 장수에 계시는 대화 스님의 도움으로 열린 ‘동사섭 법회’의 주제는 ‘지인至人으로 산다’였다. 예수와 부처 같은 성인은 못 되더라도, 내 마음을 잘 갈고 닦아서 우주같이 텅 빈 마음으로 남의 행복을 진정으로 빌어주고 이타행利他行을 베풀며 살자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나를 뭉클하게 한 것은 ‘독배毒盃 명상瞑想’이었다.
지금 내 앞에 콜라 같은 독배 한 잔이 있다. 달콤한 그 독배를 마시는 즉시 나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당장 그 독배를 마시고 죽을 수 있는가?
가상의 독배 한 잔을 눈앞에 놓고 죽음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내 마음속에 끼어 있는 수많은 탐욕과 애착의 때를 보았다.
좀처럼 독배를 들이키지 못하는 나를 보고 용타 스님께서 물었다.
“왜 독배를 마시지 못하지요?”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서요.”
“그럼 그것은 생명욕 때문에 그러니 더욱더 깊이 명상해 들어가 보세요.”
양파껍질 벗기듯 명상을 거듭하자 마침내 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독배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독배를 마신 나의 빈 마음자리를 보았을 때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죽음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최후의 꽃이다. 아니, 가장 자연스러운 생의 한 부분이고 삶 너머 삶이다. 단지 죽음이 두렵고 무섭다는 한 생각이 우리에게 죽음은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라는 마음을 심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삶 너머의 삶, 최후의 꽃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자리로 살아갈 때 우리네 삶은 더욱 행복한 삶이 되지 않을까. 자연이 되지 않을까. 매일 ‘독배 명상’을 한 번씩 하며 사는 것도 우리 인생을 꽃으로 만드는 한 비결이리라.


3. 티베트 박물관
전남 보성군 대원사에 있는 티베트 박물관에 가면 ‘죽음 체험실’이 있다. 관람객들에게 죽음 체험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지하 1층에 있는 그곳에 들어가면 우선 삼면의 벽에 걸려 있는 티베트인들의 조장鳥葬 풍경 사진이 죽음을 실감케 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어둑한 동굴과 그 안에 있는 나무관이 무덤을 연상케 한다.
죽음을 체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관 뚜껑을 열고 들어가 누워 두 손바닥을 펴고 온 몸의 긴장을 푼다. 그리고 잔잔한 티베트 명상 음악을 들으며 내가 지금 내 육신을 떠나고 있음을 묵상한다. 이때 마음속으로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연인 등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를 하면 죽음이 더욱 실감난다.
이제 빨간 천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신을 시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지나온 한 평생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데 어쩌자고 그렇게 찧고 빻으며 살았는지, 회한과 용서의 눈물이 뺨을 적신다.
호스피스 운동에 평생을 바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인생 수업’이라 했다. 그리고 그 수업을 통해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관계의 단순한 진리들을 배우며, 오늘 우리가 불행한 것은 그 단순한 진리들을 놓치고 살기 때문이라 했다.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땐 대원사 티베트 박물관에 가 관 속에 누워 한번쯤은 (행복한) ‘인생 수업’을 해보고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