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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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에 생각해본 종교적 사랑의 정신

최윤필
한국일보기자
동화나 전설 혹은 신화가 공상의 차원, 이야기의 차원을 벗어나서 일상의 구체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예는 드물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인물 캐릭터처럼 그 존재들은 처음부터 팬시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있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도 있고, 여러 작가의 상상력과 동시대인들의 기호가 어우러져 천천히 조금씩 형상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안데르센의 동화 주인공 인어공주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한 조각가에 의해 덴마크 코펜하겐의 바닷가에 만들어진 인어공주 동상은 이후 코펜하겐의 상징이 됐고,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오직 인어공주를 만나기 위해 그 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후 전 세계에,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인어공주 동상이 세워졌고 개중에는 ‘원본’보다 더 그럴싸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만, 코펜하겐의 인어공주가 누리는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훔쳐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나 소설 ‘홍길동전’ 등이 있습니다. 태어난 곳과 살았다는 곳이라 주장하며 ‘흥부마을’이라 새긴 거대한 석비를 마을 들머리에 세워둔 곳도 있고, 마을끼리 서로 자기네가 진짜라며 은근히 다투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숱한 신화와 전설 속의 인물 혹은 동물들이 전국의 산과 호수 여기저기에 바위나 나무 혹은 설악산 ‘울산바위’처럼 커다란 위용을 자랑하는 산봉우리로 서 있기도 합니다. 가히 모든 곳이 ‘전설의 고향’인 셈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산타클로스일 것입니다. 산타클로스(Santa Claus)는 어린이들의 수호성인 성 니콜라스의 별칭입니다. 알려진 바, 니콜라스는 약 1,700년 전인 서기 270년경 지금의 터키 영토인 소아시아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자선을 많이 했고, 훗날 가톨릭 대주교大主敎가 된 뒤에도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어 성인聖人 즉, 상투스 니콜라우스가 됐고, 그의 이름은 자선가의 상징으로 회자됐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제국주의자(네덜란드)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진출하면서 산테 클라스라 불렸고, 그것이 영어화하면서 세인트 클로스, 산타클로스가 됐습니다.
산타클로스가 왜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즈음에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나눠주게 됐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구글과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등에 따르면 산타클로스가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1822년 성탄절 이브로, 미국의 신학자 클레멘트 무어가 쓴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에서 비롯됐고, 지금처럼 뚱뚱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역시 19세기의 만화가 토마스 나스트라는 이의 성탄절 삽화에서 완성됐다고 합니다. 특유의 빨간 옷은 1931년 미국 해돈 선드블롬이라는 작가가 코카콜라 광고를 위해 그린 그림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불분명하지만, 로마 교회가 서기 354년 12월 25일 0시로 정했습니다.


가톨릭 구-신교 간의 알력 탓인지 산타클로스 신화에 대해 신교의 상당수 교파는 인정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산타클로스나 사슴 루돌프가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그들 교회에서는 좀처럼 불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타는 전 인류의 가슴 속에 신앙적 맥락과 무관하게 자리잡았고, 해마다 이맘때면 전 세계에, 심지어 눈(雪)이 오지 않는 열대의 사막에도, 장식 트리가 서고 반팔 차림의 산타클로스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진짜’ 산타클로스가 우리나라를 찾아온다고 합니다. 핀란드의 산타 마을 로바니에미(Rovaniemi)의 오리지널 산타가 신세계백화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전국의 9개 점포를 순회하며 사인회와 선물 나눠주기 행사 등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 니콜라스의 ‘남몰래 베푼’ 선행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특수를 노린 대형 유통업체의 판촉 행사라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입니다.
산타 마을, 크리스마스 마을 역시 전 세계 여러 곳에 산재해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만, 핀란드 로바니에미는 세계가 공인한 ‘오리지널’ 산타마을입니다. 1927년 이 지역 라디오 진행자가 ‘산타는 로바니에미의 산 꼬르바뜬두리에 산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하지만, 공인公認의 주체는 물론 인류입니다. 시내에서 떨어진 북극권 초입의 한적한 숲 속으로 그 풍광이 인류의 상상 속 산타마을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핀란드 정부의 지원, 특히 체신청의 마케팅이 큰 몫을 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산타 사무실과 그를 돕는 엘프(직원)들이 있고, 공원과 다양한 기념품점, 도서관, 우체국, 순록농장 등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연간 약 30만 명)을 상대하고, 어린이들이 산타에게 보내오는 편지(하루 평균 3만여 통)들에 답장하는 것이 산타와 엘프들의 임무입니다. 
압권은, 산타마을의 산타가 공식적으로는(대외적으로는) 단 한 명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몇 명의 산타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는지는 ‘대외비’입니다. 산타클로스는 선행의 주체인 동시에 거대한 관광산업, 스토리텔링 산업의 아이템으로 부활했고,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지 오래입니다.


아시다시피 산타클로스의 자선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선 그 대상이 아이여야 합니다. 그것도 ‘착한’ 어린이여야 하고, 우는 아이도 안 됩니다. 캐롤 속의 산타는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어린이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기 때문에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슈퍼 에고(Super Ego)이고, 좀 거칠게 말하자면 감시자이자 심판자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구별됩니다. 선행과 자선의 근본정신과도 다릅니다. 선행은 대상의 선악을 판단하기에 앞서 대상의 현재를 먼저 살핍니다. 즉 선행이 겨냥하는 것은 힘듦과 어려움과 가난이며, 선량함과 평범함 악함에 대한 정성定性분석이 아닙니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보상입니다. 성聖의 선善에 대한 보상, 결과적으로는 선과 선이 만나는 선의 잔치이며, 악에 대한 따돌림입니다.
‘선함 = 보상, 악함 = 처벌’의 인과응보의 현세적 논리는 가난에 대한 선행의 필요와 만나면서 ‘가난 = 선함, 부귀 = 악함’의 왜곡된 선입견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팀 버튼 감독의 유명한 크리스마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보이듯 가난한 아이는 착하고, 부유한 아이는 못된 아이라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또 한 걸음 나아가, 아니 자주 논리의 뒤집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즉 가난한 사람은 착하기라도 해야 작은 선행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는 논리, 가난에 국한한 선함의 요구, 순응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최근 뉴질랜드 우정공사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 접수창구를 개설하자 수많은 편지가 답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화수분 같은 초콜릿, 아이패드 등 원하는 선물을 구체적으로 밝힌 편지도 있고, 자신이 착한 아이임을 밝히는 자기변호 자기옹호의 편지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산타 할아버지, 저는 정말 착한 아이예요. 언제나 착해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등등. 이 소식을 전한 외신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잠시 덮어둔 듯, 산타의 존재를 믿는 아이들의 순진한 마음을 미소와 함께 호의적인 시선으로 소개했습니다.
성대하고 화려한 선의 잔치는 물론, 악을 주눅들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악을 선도하는 효과를 앞세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선행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인식, 그것도 내세의 보상이 아니라 현세의 물질적 보상이 따른다는 인식을 어린이들의 잠재의식 속에 주입하는 부작용도 우리는 두렵게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고 산타의 선행(선물 교환)은 어른들의 동화이기도 합니다. 부부끼리, 연인끼리, 부모가 아이에게, 친구와 친구가 서로 산타가 돼서, 물질적 사랑을 주고받는 계절이 크리스마스가 돼버린 느낌입니다. 일부에게는 부담스러운 ‘의무’가 되기도 합니다. 현세의 상업적 산타가 우리에게 끼치는 또 다른 부작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선악의 심판대에 나설 힘조차 없는, 가난한 이웃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성 니콜라스의 관심과 사랑이 간절히 필요한 이들입니다. 착해야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얻은 뒤에 (설사 그가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에 감동해서 선한 정신을 본받고자 노력하게 되는 선한 순환이 성 니콜라스의 정신, 종교적 사랑의 정신에 더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