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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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속살을 보듬는 바람 속을 거닐다

이서연
시인


 


설악산에 가을을 초대하는 비가 조용히 내렸다. 비가 곱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뜨겁게 푸름을 선물하느라 수고한 여름을 편안히 보내는 계절에 고운 비는 잘 어울리는 손님이란 생각이 들었다.
산사에 내리는 비는 산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 준다. 절대고독의 대변자나 되는 듯한 표정의 예술인들이 산사를 찾더라도 흉내내기 어려운 게 비 내리는 날의 산내음이다. 예술가들이 각각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숨통 끊어질 듯 영혼을 바친 작품을 남기더라도 비에 젖은 바람이 산을 비벼서 피워내는 향기는 담아내기 어렵다. 그러므로 비 오는 날에는 숲이나 산사를 거닐며 산내음을 온몸에 묻혀 보는 좋다. 잣나무, 소나무가 있는 숲도 좋고, 자작나무 숲도 좋다. 비에 젖은 산내음을 뼛속까지 묻혀보라. 그 순간 지병처럼 온몸에 끓던 번뇌들이 말끔히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촉촉한 먼 산에는 구도의 속울음을 막 마친 구름꽃들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구름꽃들이 하늘의 여백에 무늬를 만들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무언(無言)’도 언어이고, 미소도 언어인 이치를 깨달으라 하지 않을까. 그 누구와 눈빛이 오가는 순간에 구름이 그 눈망울에 흐르는 풍경을 본 적이 있다면 굳이 ‘사랑’을 사랑이란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자비를 자비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조용한 미소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타는 사랑의 또 다른 언어, 상처의 흔적까지 핥아 줄 자비의 향기가 될 것이다. 그 절묘한 이치는 바람만이 알 것이고.
 
산으로 밀려들던 파도처럼
백담 도량에 안개가 내려오면
파닥이던 슬픔을 쓸어 담은 긴 그리움 
독경소리에 젖어 쏟아진다
누군가, 그 누군가, 또 그 누군가의
소멸되지 않아야 하는 소망들이
돌탑의 피로 흐르는 계곡
옷 바꾸는 계절에 찬란히 깊어간다
      -‘바람이 아는 진실’ 중에서


백담사는 647년 진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지만 여러 화마에 시달리며 재건된 암자다. 지금의 도량이 만들어지기까지 역사적으로는 상처가 많은 암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해 스님의 영혼이 유물처럼 깃들어 있는 지금은 그 상처를 볼 수 없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물로 이루어진 백담계곡에서 돌탑으로 자신의 상처를 내려놓거나 혹은 가장 소중한 것을 꺼내 쌓아 놓고 있다. 오염된 상처로 오랫동안 앓던 사람들부터 이제 막 긁힌 상처에 첫눈물을 흘린 사람들까지 아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소망하는 몸부림이 돌탑마다 어려 있다. 바람만이 그 돌탑에 흐르는 피의 진실을 알 것이기에 영원히 깨지지 않아야 하는 약속이나 소망은 지켜주고 이뤄줄 것이다.
 먼 산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구름을 꽃처럼 보면서 어느 해 백담사에서 봉정암으로 올라가는 길섶으로 내려앉는 안개가 생각났다. 오로지 기도하는 그 인내심 하나로 오르던 길이었지만 그때 안개에 꽂아 둔 축원문이 있다. “한 소식 모르는 내가 그 소식을 알고자 하는 욕심은 없나이다. 그저 화두 든 한 걸음이 시(詩)가 되고, 시로 걷는 두 걸음이 불음(佛音) 되어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이든 오열하는 영혼 보듬을 원력되게 하소서…”
 내 핏줄 하나 세상 밝히는 사람 되게 하고픈 기도를 품고 시작한 산행이 봉정암을 향하면서 누구 하나를 위한 소원을 갖는 게 미안했다. 허접하나마 ‘시인’이라는 문패를 걸고 있는 이상은 만해 스님만큼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함께’‘더불어’ 불국(佛國)을 향하겠다는 원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가을을 모시고 오는 고운 비가 살짝 내리는 날 찻집은 잠시 계절이 바뀌는 시간을 깊숙이 들어가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함께 한 문인들과 보이차를 나누어 마셨다. 보이차가 따뜻한 물에 울궈지는 동안 만해마을에서 열린 문학심포지엄의 뒷얘기가 찻잔을 먼저 데웠다.
 문학을 포함해 예술은 인간이 내적으로 체험하여 얻은 영혼을 표현하는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에 다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 늘 숨어 있다. 글을 읽는 독자나 예술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살피며 인간 본성과 삶을 사색해 보는 사람들이 표면에 다 드러나지 않은 숨은 감정을 두고두고 찾아낸다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 다른 면을 찾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각도에서, 다른 관점으로 해석되는 것도 성공이라 하겠다. 
 백담다원은 ‘농암실(聾庵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왜 ‘귀머거리’ ‘어리석음’ ‘어둠’을 의미하는 글씨가 씌인 방인지 알 수 없으나 과문한 탓에 그저 내 마음가는대로 ‘깊은 고독을 녹이는 침묵의 방’으로 해석해 본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냥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조주 선사의 일화처럼 무엇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어리석음을 놓아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음이 비어있어야 차 향기라도 들어갈 수 있듯이 어리석음이 없어야 깨달음의 길이 보이지 않겠는가. 그 마음을 비우는데 가장 먼저 귀머거리가 되어야 한다면 아니 귀머거리가 여기서 차 한 잔하며 침묵을 다스릴 수 있다면 중생심 한 껍질 벗겨낼 수 있지 않겠나 싶다.


난 귀머거리가 된 채 물소리를 듣습니다
물소리는 내 눈을 열어주는 향기가 됩니다
귀 열고 눈 여니 차 한 잔이 가슴으로 스밉니다
차향이 머무는 귀로 빗소리를 듣습니다
빗소리는 가슴 속 사연을 만나게 합니다
삐끗했던 인연도 용서하니 차향이 됩니다
                 -백담사 ‘농암실(聾庵室)’에서-


비 그친 자리에 여름을 배웅하는 햇살 하나가 백담계곡 내려가는 길의 담을 타다 미끄러진다. 그 햇살이 분명 내일은 가을 한 겹을 더 물고 올 것이다. 설악은 조용히 그렇게 가을을 시작하며 착하게 단풍 들 것이다. 시작 없이 왔다가 어떤 것이 마지막 모습인지 알 수 없게 가는 건 계절만이 아니다. 온 듯해도 머무는 흔적없이, 간 듯 해도 떠나는 흔적없이 나 또한 여기 온 마음은 계곡 물에 흘려 보내고 착한 단풍처럼 곱게 가난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