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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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성으로 상호 의존하니 비롯함 또한 없다네

오로지 무자성하네
때문에 상호 의존하네
실체가 있어 자성이 있다면
그 자체로 비롯하는 마음자리가 있음이라
상호 의존하는 그 자체가 공함을 보라
                                    -입중론 가운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이 인간의 내면과 육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한 예로 질투와 같은 감정은 즉각적으로 면역력에 영향을 준다는 병리학적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치 뜨거운 물에 찬물이 섞이면 미지근해지는 원리와 같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 역시 시간의 여백을 두고 돌이켜 서서히 보통의 감정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행복을 원하듯이 다른 이들 역시 나와 다름이 없는 행복을 원합니다. 때문에 사랑과 자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입니다. 종교 역시 사랑과 자비를 제 일의 덕목으로 삼습니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보살핌과 같은 것이 바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생명 지닌 모든 존재하는 바의 근간이 사랑과 자비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행복의 척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70억의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공통의 분모가 바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공공의 선한 방향을 위해 활용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바른 불교도라면 일체중생을 위하겠다는 보리심을 내어 생명 지닌 모든 존재는 행복하기를 서원해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나를 곤란에 처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이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이를 인욕 수행의 바라밀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임을 알고 마주한 어려움을 대해야 합니다. 그때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랑과 연민이며 보리심이 바탕이 되었을 때 올바르게 해결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을 통해 서서히 이기심을 줄여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본질로 묘사됩니다. 이 세상을 실제 하나님이 만드셨고 유일한 아버지와 같아 인간은 모두 형제자매로 통칭 됩니다. 한 분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식 간에 서로 불화가 일고 살생이 벌어진다면 정작 본질에서 왜곡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과거 인간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본래 취지와 달리 종교로 인한 피의 전쟁이 빈번했습니다. 반면 불교는 어떠합니까. 인과응보의 논리에 충실합니다. 이미 기원전부터 수론학파 사상가로부터 인과론이 논의되었고 불교에 이르러 무아론이 형성되면서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생함을 증명하였습니다.
나란다 승원의 학제 전통에 근거하면, 산스크리트어를 중심으로 인식론에 중점을 둔 붓다의 말씀을 수학하였습니다. 반면 남방불교는 삼장을 빠알리어로 수학하였는데 율장의 체계가 잘 잡혀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논리적으로 접근을 해야만 현실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요의와 불요의로 구분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나란다 승원에서 전승된 논리 체계에 주목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붓다께서도 비구에게 항시 이르기를, 말 그대로 따르지 말고 논리적으로 고찰해 보라고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분석과 실험을 통해 명료한 분석의 결과를 증명하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공존하는 시대에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도는 나란다 승원의 논리 차제를 확립하신 역대 선지식이 남기신 논서를 통해 삶을 대하는 자세의 처세술을 대하고 있습니다. 현 70억 인류 가운데 10억의 인류는 종교를 믿지 않거나 부정하는 이들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다종교 시대의 우리는 그러한 비종교인 또한 통섭하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현 21세기는 물질적으로 과부하가 된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욕망도 면밀화 되고 다중화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외롭고 불안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과 채워지지 않는 궁핍함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내면을 살피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지금 내 주변의 사람을 얼마나 배려하고 계시는가요. 얼마나 대상에 집착하고 또한 상대에 강요하고 있는지요. 나와 다름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이고 또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요. 과거 불교도 내에서도 분쟁이 일었습니다. 내부의 갈등은 근본정신은 물론 목적의식까지 오염시킵니다. 그 때문에 불교는 논리적으로 합리화 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요구에 부응하여 현대과학과 불교가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인무아 그리고 법무아는 양자물리학과 상통하는 면에서 흥미롭게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경계와 마음의 분리, 실제 존재의 여부에 대한 형색을 다양한 각도로 고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호 의존하여 이름과 소리에 의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연기의 논리를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의 본래 대상은 실제로 그 어디에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반야의 정수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합니다.
중관학파에서는 자성이 실제로 하지 않는다 하여 일체 무자성이라고 합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에 이름을 부여한 것일 뿐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바로 보는 바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무명 때문에 중생은 윤회합니다. 업과 번뇌를 끊은 자리가 바로 해탈입니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은 분별과 망상으로 윤회의 인을 만들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