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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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과 소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절에 다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재가불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 많이 받게 되는 질문 중의 하나가, 불교에는 왜 이렇게 경전이 많으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경전을 읽어야 하는지 추천해달라고 한다. 돈이나 물자는 많을수록 좋을 수 있지만, 공부해야 할 책이 많은 게 좋기만 하지는 않다. 시험 범위 넓어서 좋을 게 뭐 있나? 수행과 인생살이에 지침이 되는 경전을 찾으려는 저분들에게, 그 대답을 이번 기회에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간략하게’이다. 그런데 아무리 ‘간략하게’라도 최소한의 배경 설명과 기초지식은 필요하다. 그러니 이하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불자라면 최소한 공부해두어야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겠다. 불경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첫째 부류는, 마야부인의 몸에서 태어[生身]나 ‘종교 체험’을 하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실제로 비구比丘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아함경(또는 니카야)’류이다. 둘째 부류는, 보편적 진리를 몸으로 삼으시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부처님을 ‘종교 체험’한 불자佛子들이 역사의 인물과 가공의 보살들을 등장시켜 연출한 경전류이다.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이들은 전자를 ‘석가경釋迦經’, 후자를 ‘사나경舍那經’이라고 한다.
위에서 말한 어느 부류의 경전이나 모두 ‘종교 체험’에 기초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한다. 물론 이 때의 ‘종교 체험’은 ‘진리의 보편성[法性]’을 담보로 한다. 역사상의 석가모니부처님도 그 진리(=법성)를 체험하셨다. 그러니 어느 부류의 경전을 선택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경전에 담긴 이야기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전통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우리는 ‘교학敎學’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지성사는 ‘경전’과 ‘교학’ 두 축으로 전개된다.


2.
하나의 경전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있어 전체 경전의 이야기를 진행해간다. 때문에 하나의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이야기’들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그것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즉 이야기들의 양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들의 양상, 이것을 이 분야 전문가들은 ‘교상敎相’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내 손에 들려 있는 하나의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의 진행 양상[諸敎行相 제교행상]’을 공식처럼 꿰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에서 필자는 ‘전통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이야기들의 진행 양상[諸敎行相 제교행상]’을 설명하는 방법(또는 방식)이 학승들마다 다를 수 있는데, 그들 중에서 ‘이야기[敎]’의 행상을 (1)인천교, (2)소승교, (3)대승법상교, (4)대승파상교, (5)일승현성교로 설명하는 부류들이 있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들 ‘성종性宗’ 또는 법성종法性宗이라 부르면서, ‘(5)일승현성교’야말로 불교 체험의 가장 궁극적 ‘이야기[敎]’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화엄경』 속에는 이상의 (1)-(5)의 모든 이야기가 원만하게 다 갖추어졌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성종’에 속하는 학승들은 위와 같이 ‘제교의 행상’을 분류하기도 하고, 또 각 ‘가르침[敎]’에 담겨있는 ‘의미의 결[義理]’들이 진리의 전체 영역에서 어느 범위까지를 설명하고 있는가를 논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전문용어로 의리분제義理分齊라고 한다. 또 ‘이야기[敎]’를 전달하는 매체(예를 들면 문자, 음성,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능전교체能詮敎體’라 한다. 또 ‘이야기[敎]’를 듣는 대중들의 수준 즉 근기根機를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소피기의所被機宜’라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이야기[敎]’를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총론적으로 때로는 각론적으로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를 교기인연敎起因緣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경전에 등장하는 각종 ‘이야기[敎]’를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정리한다.
이상의 설명을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도 금년(2019년)으로 2563년째가 지나가고 있다. 기라성 같은 천재 ‘학승’들이 출현했다. 18세기 근대적 의미의 불교학이 시작되면서 부터는 신앙과 무관하게 무수한 ‘교수’들도 배출되었다. 불교와 관련하여 ‘학승’들과 ‘교수’들이 연구한 결과를 ‘간략하게’ 총정리하면, 불교의 경전을 해석하는 ‘해석의 계보’는 크게 둘로 요약된다. 첫째 계보로는 수많은 부파 중에 지금도 남방에 전승되는 ‘유부有部’가 있고, 둘째 계보로는 ‘대승大乘’이 있다. 대승은 다시 세 계보로 분류되는데, 상종相宗, 공종空宗, 성종性宗이다. 저들이 으뜸으로 ‘주장하는 핵심 취지[종취宗趣]’가, 유有이냐, 아니면 상相이냐, 아니면 공空이냐, 아니면 성性이냐, 그 ‘종취’에 따라 경전을 해석하는 교학이 달라진다.


3.
위의 분류는 불교의 수많은 경전을 요령 있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긴 ‘학설’이다. 소위 ‘썰’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과연 이런 학설을 택해서 경을 읽을 것인가, 또는 말까는 본인의 선택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요령 없이 경전을 읽기는 쉽지 않다. 필자는 권한다. ‘유부有部’의 방식으로 경전 읽기를 하던, 아니면 상종相宗의 방식으로 하던, 아니면 공종空宗의 방식으로 하던, 아니면 성종性宗의 방식으로 하던, 어느 하나의 방식을 우선 철저하게 마스터하는 것이 좋다고. ‘교학’에 입각한 ‘경전’ 읽기를 하라고 말이다.
높고 큰 산을 온전하게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산을 오르내려한다. 그런데 그 ‘길’은 수만 갈래가 있을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네 갈래는 역사적으로 잘 검증된 ‘길’이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안내자가 다르고, 처해 있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길’의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저마다 제 ‘길’이 최고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그 ‘꾼’들의 말이니, 거기에 넘어가지 말고 독자들은 주체적으로 하나의 ‘길’을 택해서 꾸준히 연마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다른 ‘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경청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혼동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요즈음 한국의 절 또는 스님들을 분류할 때에 쓰는 ‘조계종’이니 ‘태고종’이니 ‘천태종’이니 ‘진각종’이니 하는 말을 쓰는데, 이 경우의 ‘종’은 ‘교단’을 뜻하는 의미의 ‘종’이다. 이들은 ‘인적 자산’이나 ‘물적 자산’을 기준으로 모인 단체로서, 일본불교 역사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제도이다. 일제식민지 시기 우리나라도 저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껏 쓰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저런 종단들은 위에서 말한 유부有部, 상종相宗, 공종空宗, 성종性宗, 이 네 가지 중에서 어떤 방법으로 저 수많은 불교경전 속에 담긴 ‘이야기(敎)’들을 이해하고 설명할까? 대답은 ‘성종’이다. 단, ‘진각종’이나 거기에서 분파된 밀교계통의 종단은 좀 다르다.
지나가는 김에 한마디 더 하기로 한다. 그러면 중국의 ‘선종禪宗’은 어디에 속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선종은 출현 자체가 ‘부처님의 마음’에 주목했지, ‘부처님 말씀’인 경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런 태생의 요인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 고유의 ‘교리의 행상[敎相]’을 세우지 않았고 언급하려들지도 않는다. 설사 언급하더라도 단편적이다. 저들은 언어 이전의 진리 체험, 그 체험도 ‘돈오頓悟’의 방법을 최상으로 꼽았다. 


4.
부처님의 말씀은 위에서도 분류했듯이 크게 둘이다. 하나는 ‘석가경’이고 다른 하나는 ‘사나경’이다. ‘석가경’과 ‘사나경’ 모두를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수용하는 후대의 학승들은 자신을 ‘대승’이라고 자칭하면서, ‘석가경’만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남들을 ‘소승’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여기에서 우리가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분류는 ‘교상’이 넓으냐 좁으냐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지, 경전 자체를 평가하는 말은 아니다. 깨달은 이의 이야기 모음집인 경經에 담긴 ‘종교체험’에 어찌 우열이 있겠는가? 어느 인생인들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소승경전’이니, ‘대승경전’이니 이름 붙이는 방법은 적절하지 못하다. ‘석가경’이니 또는 ‘사나경’이니 명칭을 붙였던 과거 학승들의 속 깊은 생각을 잘 받들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런 점은 있다. 즉, 인도 나라의 말로 진리를 ‘종교체험’한 사람을 ‘부처’라고 부른다. 거기에 존칭을 나타내는 뜻으로 ‘님’자를 붙여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에 속하는 부류를 인도 땅에 태어나신 석가모니부처님만으로 한정하다면, 이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좁은 것은 분명하다. 진리의 보편성에 주목하는 불자佛子들은 ‘부처님’의 범위를 좁게 잡는 견해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석가경’과 ‘사나경’ 모두를 깨달은 이들의 ‘종교체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경전의 세계로 들어가는 ‘폭넓은 길을 논했던 스승’ 즉, 대승논사大乘論師이셨다. 필자는 그런 분들의 입장에 동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