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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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관리법(4)

 


성운대사 지음
조은자 옮김


<지난호에 이어서>


“소 사고님이 맡지 않으면 양 조장도 다른 사람에게 안 넘기겠답니다. 보다시피 그녀도 이제 백발성성한 노인이 다 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니, 소 사고도 허락하였고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었습니다.
세간의 각종 관리 가운데 물품의 관리나 일, 금전, 시간, 공간의 관리는 모두 쉬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물품은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고 당신한테 항의하지도 못하니, 배치하는 만큼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일처리도 일정한 원칙이 있으면 됩니다. 일의 경중과 완급을 제대로 파악하고, 일의 좋고 나쁨, 득과 실을 정확히 가늠하면 관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관리학 중 가장 관리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른 사상, 서로 다른 습관,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의견 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다름 가운데에서 어떻게 사람을 통섭하는 가가 사실상 가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렇다 해도 저는 사람이 서로 부딪히며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책임을 기반으로 하고, 충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모두가 친한 친구이자 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사관리에 대해 저는 ‘관기觀機’를 알기만 하면 적절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불광산은 그 후 양자만 보살을 불광정사에 모셔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시도록 했습니다. 젊어서부터 이란 염불회와 불광산을 위해 고생한 그의 헌시에 대한 보답인 셈입니다.
불문은 보수도 없고 대우도 높지 않고 그저 발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인재를 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인연이 닿아 발심하신 젊은이와 보살들은 기도하는 곳마다 응답하시는 관세음보살처럼, 이곳에 오면서 괴로움과 어려움에 처한 이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불광산에서 발심하여 봉사하시는 분들은 진정 보살도를 행하시는 분들입니다.


장소제張少齊


장소제 거사는 저의 은사이신 지개 상인志開上人과 동년배이므로 제가 마땅히 스승님으로 받들어야 하는 분입니다. 그분과의 인연을 말씀드리자면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제가 서른 살 무렵, 그분께서는 제게 『각세순간覺世旬刊』의 편집을 맡기셨고, 더해서 총 편집까지 맡아 달라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었고, 이런 경험을 통해 배울 것도 많겠다 생각해 승낙했습니다.
사실 제가 신문 편집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보잘 것 없는 재주를 높이 사 주셨기에 저도 제법 훌륭하게 해왔습니다. 선생께서 『각세순간』을 저에게 완전히 일임하신 후 저는 40년 동안 운영하며 멈춘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2000년 『인간복보人間輻報』를 창간하였고, 저는 『각세』를 『인간복보』로 바꿔 계속 발행하였으며, 『인간복보』의 부록을 ‘각세 부록’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까지 합한다면 발행한 지 60년이 다 되어갑니다.
한 자족처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친근하게 ‘장 선배’라 불렀던 장소제 거사는 신문풍新文豊 인쇄공장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장경을 인쇄 발행하고 싶었던 그는 제게 상무이사를 맡아 달라 요청했습니다. 빈곤하기 이를 데 없던 그 시기에 제게 무슨 돈이 있어 인쇄공장에 투자해 대장경을 인쇄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를 생각해 주신 호의를 생각해 홍법 초기 기본생활조차 이어 가기 힘들던 상황에서 겨우겨우 오천 원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2, 3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는 또 제게 “우리도 인쇄공장을 운영할 줄 모르니 유劉씨 성을 쓰시는 불교 도반에게 공장 경영을 맡깁시다” 하고 제안했습니다. 저도 흔쾌히 찬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첫 상무이사의 명의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도와주며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잡지 편집할 때는, 작가는 아니지만 『인생잡지』를 편집하는 저를 도와주고자, 투고할 여러 편의 글을 써내며 저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당시 ‘중화불교문화관中華佛敎文化館’이 베이터우(北投)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땅값도 무척 비쌌습니다. 그러나 동초東初 스님은 기이하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화불교문화관’의 이사장을 자신의 제자인 성엄聖嚴 스님에게 맡기지 않고, 재가 장로인 장소제 거사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언을 남길 때 장 선배는 이미 연로하여 더 이상 사회봉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화불교문화관’은 더 발전해야 하고 불교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장 선배와 한담을 나누다 별 뜻 없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선배님, 굳이 이사장을 해야 하십니까? 이사장은 동초 스님의 제자인 성엄 스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젊고 불법을 널리 알리는 데 의지도 있는 그에게 맡기면 장차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한 뒤,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후에 성엄 스님이 이사장에 취임해 법고산法鼓山을 창건했습니다. 이 일의 성취에 있어 저의 공헌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 생일을 쇠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른 살 때 뜻밖에도 그가 신도들을 독려해 잔치를 베풀어 저를 축수해 주었습니다. 지극한 그의 정성에 저도 감동하였습니다. 장 선배의 변함없는 관심·신임·사랑에 감사하며, 30년 전 그가 미국으로 이미 가는 데 도움을 드렸고, 미국에 있는 제자 또한 수 년 전 백세를 넘겨 타계할 때까지 그의 가족 모두가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돌봐 드렸습니다.
이 분과 저의 인연은 마음으로 서로를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저는 지극히 성실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며, 타인이나 친구를 멋대로 의심하거나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가식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가 자상하고 온화하다 생각하기에 우리는 일생 상대방을 존중하고 우의를 나눴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신리하고 서로 돕고 인연을 맺어야지, 원한을 맺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함께 사는 원칙이자 관리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