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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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거리에서 중생들과 숨쉬다

진묵 일옥(震. 一玉, 1562~1633)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지식인 정약용·김정희와 두터운 교분을 가졌던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스님은 자신의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써 흠모하였다.


우리 대사는 마치 저 바다가 모든 냇물을 마시고, 저 대지가 모든 산을 다 떠받는 것과 같이 모든 방면에 능통한 분이다.


진묵스님의 일생과 수행을 낱낱이 살펴 글을 썼으니 적절한 비유라고 할 만하다. 모든 냇물을 삼키는 바다와 같고, 모든 산을 떠받는 대지라고 할만하니 그 성품과 기량이 광대무변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명종 임금 때에 태어나 인조 임금 때에 입적하셨다. 당시는 사림士林세력이 정권을 잡고 당쟁과 사화士禍로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었고, 호남에서는 1589년 정여립鄭
汝立의 모반사건이라 하여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호남지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더욱이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백성이 몹시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시기였다.


진묵스님은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전북 김제군 만경면 대진리이다. 스님이 태어날 때 불거촌의 풀과 나무가 3년 동안 시들었으므로 불거촌 사람들이 “세상에 드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 태어나서부터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내 나는 고기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슬기롭고 마음이 자비로웠기 때문에 “불거촌의 산부처”라고도 하였다. 스님은 7세 되던 해 전주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栖寺에 귀의하여 처음으로 불경內典을 읽었다. 읽을 때는 마치 칼날이 뿔을 만나 해체해 나가듯이 한번 눈이 스쳐 가기만 하여도 줄줄 외우곤 하여 아무도 그의 스승이 되어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사미沙彌로만 생각하였다.
한번은 그 절의 주지가 스님에게 향을 사르고 신중神衆께 예배를 드리라고 시켰더니, 오래지 않아 그 주지의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 일제히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모두 작은 신神들인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그분에게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는 일을 하지 말게 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부처님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 것이라고 대중들 사이에서 떠들썩했다. 또한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의 고제高弟였다. 그는 문신文臣으로 초명은 동기東起,자字는 이식而式,호는 봉곡鳳谷이다. 광해군의 폭정하에서는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된 인목대비를 홀로 찾아뵈었고, 사계 김장생의 추천으로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스님은 그와 서로 왕래하면서 사상적 핵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유교와 불교를 가리지 않고 사귐을 가졌으니 이 둘은 다 한 시대의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스님은 봉곡에게서 『강목綱目』을 빌렸다. 봉곡은 하인을 시켜 그것을 지고 스님을 따라가게 했는데, 스님은 책을 한 권 뽑아서 다 읽으면 길에 던져 버리곤 하였고, 하인은 따라가며 그 책을 주워 담았다. 30리쯤 되는 거리의 절 가까이 다가가자, 70권 책 한 벌을 다 읽었다고 한다. 다른 날 봉곡이 진묵 스님에게 물었다. “책을 빌려 가서 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고기를 잡고 난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이랍니다.”
선생이 시험 삼아 책을 뽑아 내용을 물어보았더니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진묵스님의 수행과 관련된 일화이다. 스님이 일찍이 변산부안군 월명암月明庵에 살고 계셨을 때이다. 시자侍者의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속가俗家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미리 스님의 공양을 준비해 탁자 위에 놓아두고 아뢰었다. “공양을 여기 차려 두었습니다. 공양 때가 되거든 챙겨 잡수십시오.” 그때 스님은 방장실方丈室에서 창문을 열고 앉아서 문지방에 손을 얹고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 시자가 속가에서 묵고 암자로 돌아와 보니, 대사는 어제 그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대사는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에 손이 찍히어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손을 거둘 줄도 모르고 태연히 경전만 읽고 있었고, 탁자 위의 공양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문안 인사를 올리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왜 제사에 참례參禮도 않고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아마도 스님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서 밤이
이미 지난 줄을 모르셨던 모양이다.


하늘은 이불이고 땅은 자리이며 산은 베개라네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며, 바다는 술통이네
거나하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스님이 읊은 시이다. 초의스님이 스님을 두고 모든 면에 능통하셨다고 했다면, 이 시는 스님의 무애자재한 모습이고, 당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던 석가모니의 모습이다. 특히 거나하게 취해 춤을 추고자 하나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는 표현은 스님의 근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요
슬하에서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 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부족한데
백 년 생애에 백 년도 채우지 못하시었으니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짧습니까?
한 표주박을 들고,
노상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녀를 꽂고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불공과 하단의 제가 끝나니 승려는 각기 방으로 찾아가고
앞산 뒷산 첩첩산중인데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로 가시었습니까?
아! 슬프기만 합니다!
어머님이시여! 구품연대에 안주安住하옵소서.


진묵스님이 돌아가신 노모님의 영전에 바친 제문祭文이다. 못난 자식이 은혜를 다 갚지 못했는데 어머니의 수명은 왜 그리 짧은지 한탄하고 있다. 스님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스님은 일출암日出庵에 살았고, 어머니는 전주 왜막촌倭幕村에 살고 계셨을 때의 일이다. 여름만 되면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였으므로 스님이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모두 다른 지방으로 쫓아 버리게 하였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는 모기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아주 사라졌다고 한다. 스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 북면北面 유앙산維仰山에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그 묘소에 벌초를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 그 사람의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다른 사람 보다 뒤질세라 앞다투어 묘소를 돌보곤 하였다. 그 전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그 묘소는 늘 깨끗하고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어느 날 스님이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지팡이를 끌고 산문을 나갔다. 시냇가를 따라 거닐다가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 서서 손으로 물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하였다.


“저것이 바로 석가부처님이니라.” 시자가 “저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스님이 “너는 단지 가짜 스님만 알 뿐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 그러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나는 이제 떠나련다. 그대들은 무엇이든 물어보라.” 제자들이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누가 종승宗乘을 이어받습니까?” 대사는 대답하였다. “종승이 어디에 있다는 거냐?” 제자들은 재삼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하는 수 없어 대답하였다. “명리승名利僧이지만 우선은 정靜 장로에게 부촉한다.” 그러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나시니, 세속 나이 72세였고 법랍은
52년이었다. 그때가 바로 1633년(인조 11) 10월 28일이었다. 정靜 장로가 ‘청허 휴정’이나 ‘사명 유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들의 생몰년으로 본다면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