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특집 생전예수재1
    특집 생전예수재2
    특집 생전예수재3
    생활세계와 불교
    절문밖 풍경소리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인간 붓다 기행
    금강계단
    불화의 세계
    지상법문
    반야샘터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과월호보기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인생






  정우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화엄경(華嚴經)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보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법을 말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해놓았습니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법을 말함이 있으니, 이른바 모든 법이 다 인연으로 생긴 것을 말하며, 모든 법이 환술과 같음을 말하며, 모든 법이 다툼이 없음을 말하며, 모든 법이 끝이 없음을 말하며, 모든 법이 의지한 데 없음을 말하며, 모든 법이 금강과 같음을 말하며, 모든 법이 진여와 같음을 말하며, 모든 법이 모두 고요함을 말하며, 모든 법이 다 벗어남을 말하며, 모든 법이 다 한 가지 이치에 머물러 본 성품을 성취함을 말하나니, 만일 보살들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교묘하게 모든 법을 말하느니라.』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본다면, 첫째, 모든 보살은 열 가지로 법을 말하는데 이른바 모든 법은 다 인연으로 생겨났다는 말씀이며, 둘째, 환술(幻術)과 같다는 것은 임시로 또는 한시적으로 나투어서 일깨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다툼이 없다는 것은, 법이라는 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요, 본래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느는 것도 아니고 감하는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대소(大小)와 장단(長短)이 없는 자리인데, 우리들의 분별식심(分別識心)으로 인해서 지혜가 부족한 나머지 시비하고 분별하는 것이지, 본래 모든 법은 다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 끝이 없다는 것은 한자 뜻 그대로 무종(無終)한 것을 말하고, 다섯째, 의지한 데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가 다 법이라는 말씀이며, 여섯째, 금강(金剛)과 같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흔들림이 없고 그 무엇으로도 법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곱째, 진여(眞如)와 같다는 것은 참과 같다는 것인데, 비유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한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참으로 빈자리는 오묘한 자리’라는 말인데, 참으로 비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있다는 자리도 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식심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시비하고 내 소견으로 모든 것에 대한 높낮이를 정하는 것이지, 그 자리는 그런 분별식심으로 얘기할 수 없는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덟째, 고요하다는 것은 시끄러운 상태에서 조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있는 현상 그대로가 고요하다는 말씀이며, 아홉째, 벗어남이라는 것은 끄달림이 없이 놓을 줄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삶이라는 것이 한없이 천년만년 살고 싶겠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은 뜻에 맡기고 건강도 좋고 젊음도 좋고 목숨도 소중하지만 영원하지 못하다면 사는 그날까지 열심히, 여한 없이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티베트인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힘차게 일어나서 부처님 전에 󰡐오늘 하루 건강하게 시작하겠다󰡑는 기원을 하고, 하루를 마감하고 이부자리에 들기 전에는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면서 󰡐오늘이 마지막이지󰡑하고 이부자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것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혜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열째, 한 가지 이치에 머물러 본 성품을 성취한다는 것은 본 성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10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하셨을 뿐이지, 모든 법은 다 한 가지 이치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팔상도(八相圖)인데, 이 팔상도에 보면 부처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 즉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서 구품행보살(九品行菩薩)로 계시다가 사바중생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수행정진의 덕목이 외형상으로 32상(相) 80종호(種好)의 출중한 장부의 모습이 저 만개한 보름달 같지만, 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중생들을 인도하고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네.』


  여기서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는 어떤 세상입니까? 욕계는 욕심의 세상이고 속계는 물질의 세상이며 무색계는 비물질의 세상입니다. 더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욕계는 밥을 먹으면 배부른 세상이고 색계는 냄새만 맡아도 배부른 세상이며 무색계는 생각만 해도 배부른 세상입니다. 이 삼계 중에 어떤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무색계의 세상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욕계와 색계에서 헤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뭔가는 건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상함, 즉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이치를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롭다괴롭다 해도 무상한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괴롭다괴롭다 해도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를 겪는 중생의 분별식심만큼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구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건져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바르게 관찰하고 올바른 생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만 합니다.


셋째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차만별의 변별력으로 그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서 설하시지 부처님 입장에서 설하신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가 다 중생들의 경계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설하신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응용해서 설명하자면, 시주하라고 했습니다. 보시하라고 했습니다. 공양 올리라고 했습니다. 바라밀(波羅蜜)을 닦으라고 했습니다. 내 입장에서, 내 수준에서, 내 처지에 맞게 시주하고, 보시하고, 공양올리고, 바라밀을 닦으라고 했습니다.


살다보면 남에게 받는 것보다 자기가 주는 게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정성을 담아주면 고맙고 기쁘기도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춰보면 누가 나에게 주는 것보다는 내가 그에게 주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것이 보시입니다.


그러한 자세로 여한 없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언제,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갈 곳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살고 사회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열심히 한 사람이라면 그는 회사를 놓고 나와도 갈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을 열심히 살지 못한 사람은 항상 내몰리는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에 있는 대로 불안하고 퇴근을 해서 밖으로 나와본들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다 포장마차를 거쳐 새벽녘에 근근이 집으로 기어 들어오는 형국입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구천을 떠도는 영혼 같은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침을 따라서 능히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네 번째는 깨달음에 회향코자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방에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어도 등불이 있으면 바로 찾을 수 있듯이, 무명에 가려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깨달음의 등불로 환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인연과 연기의 법칙으로 구성되고 운영되어진다는 이치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해(萬海) 스님은 일제 치하에서의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일본이 밉다고 성북동 비탈길에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북향으로 집을 지어놓고 심우장(尋牛莊)이라 이름 짓고 사셨습니다.


이에 경봉(鏡峰)스님이 편지를 써서 질문하기를, 󰡐심우장이라면 소 찾는 집이고 스님의 호를 목부(牧夫)라고 지었으니 소를 키운다는 뜻인데, 소를 찾는다는 것이 맞습니까? 소를 키운다는 말이 맞습니까?󰡑라고 했답니다. 이에 만해스님이 답하기를, 󰡐늙은이가 할일이 없어서 망상을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경봉스님이 󰡐차나 한 잔 드시오.󰡑라고 답장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글을 접하면서 심금이 울리고 가슴이 떨림을 느꼈습니다. 과연 선지식 사이의 대화로구나 하는 생각에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말법시대가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부처님의 가르침을 친히 듣고 보고 또 오랜 세월을 거쳐서 배우고 익혀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듣고 보고 익혀온 풍습을 져버리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옛 글에서 이르기를 󰡐뜬구름 같은 이름을 탐하는 것은 부질없이 몸만 괴롭히는 일이고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내 업(業)의 불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섶을 보태는 격󰡑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아니하듯 부처님 가르침도 세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몸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이 바로 수행이요, 정진이요, 놓는 공부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