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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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이 곧 연기임을 알아야






  달라이 라마
  티베트 승왕



물리학자들이 양자론(量子論)으로 물리세계를 해석할 때, 실재라는 개념을 어떻게 가정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젠 개념으로서의 실재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할 때,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편의 극단으로 건너뛰어서 모든 것이 순전히 환상이고 우리 마음이 투사한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유식학파가 걸린 유심론(唯心論)이라는 덫에 빠질 것입니다.

만일 사물들이 내재적인 존재를 갖고 있지 않고, 모든 것은 마음이 투사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결론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달리 선택할 길이 무엇일까요? 양 극단이 아닌 중도(中道)는 무엇일까요? 사물들과 사건들은 많은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로서 생겨났을 뿐이며, 그것들이 관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합된 것들 각각에게 우리가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관론자들의 대답입니다.

공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불교 논서들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연기법의 이해에 기본을 둔 이론이 가장 효과적인 것같습니다. 연기법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논서는 붓다빨리따와 짠드라끼르띠의 논서들입니다. 저는 주로 쫑까빠 스님의 설명에 의거해서 이 주제들을 이해했고, 오늘도 그에 따라 설명했습니다. 쫑까빠 스님의 설명은 짠드라끼르띠와 붓다빨리따가 나가르주나의 논서에 붙인 주석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쫑까빠 스님은 주로 그 두 분의 주석서를 인용하여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 논증했습니다.

저는 나가르주나의 ≪근본중론≫에서 십이연기법을 다루는 제23장과 무아(無我)를 다루는 제18장을 연결시켜 공부했습니다. 제18장에는 영원한 원리나 물질적으로 실제적인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잡착하는 과정, 우리가 그 집착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윤회에 매여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아’를 부정하고‘아’에 대한 집착을 뿌리 뽑고, 해탈로 가는 방법도 설명합니다. 요점은 공성을 통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두 장을 공부한 후에는 제24장과 연결시켰습니다. 제24장에서 나가르주나는 불교의 실재론자들이 제시할 만한 반론들을 예시했습니다. 그 반론들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됩니다.만일 내재(內在)하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고, 사물이나 사건에게 내재하는 존재가 없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제도 존재할 수 없다. 만일 사성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삼보(三寶)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실재론자들의 그런 주장을 뒤집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만일 사물이 내재적으로 존재한다면, 내 이론의 결과라고 덮어 씌웠던 것이 오히려 실재론자들이 주장한 결과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물이 내재적으로 존재한다면, 사성제는 전혀 들어맞지 않고,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공성의 의미는 무(無)나 단순한 무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제24장의 요점입니다.
공성을 연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물들은 연기하기 때문에, 즉 의존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