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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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재일(成道齋日)의 의미(意味)와 자세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은 부처님의 십 명호(十名號)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후대인들이 부처님을 찬탄하며 경배하는 뜻에서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얼마만큼이나 찬탄했었는가를 보여주는 게송이 여기 있습니다.
『진묵겁전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이었건만 위도중생현세간(爲度衆生現世間)하셨네. 위의덕상월륜만(威儀德相月輪滿)하사 어삼계중작도사(於三界中作導師)이시니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시겁래(無始劫來)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자리에서 일찍이 깨달음을 이루셨지만, 우리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32상(相) 80종호(種好)의 위의를 구족하신 부처님은 마치 허공에 떠있는 보름달과 같으시고, 삼계(三界)육도(六道)의 가지가지 종성을 지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일생을 통해서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깨달음을 이루신 납월팔일(12월 8일)은 가슴 벅찬 마음을 여미며 환희법열의 감격스러움을 불자들은 느끼실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르치고자하는 주요 목적은 목마름을 느끼는 이에게 물이 간절하듯이, 우리들의 삶에 감로수 이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근기나 우리들의 성향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방편으로 사용해서 팔만장교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조건적인 이론이나 획일적인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자정기의(自淨其意)하면 시제불교(是諸佛敎)니라.”
이 가르침은 어떤 근기의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가르침의 방편은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이 그 사람에게 적절하지 못한 가르침이었을 때는 그것을 거두어들이기도 하셨고,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약방문(藥方文)과도 같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날 성도재일인 임진년 새해에 불자가 지녀야할 덕목으로 네 가지로 의지해할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
둘째, 이치(理致)에 의지하고 말(語)에 의지하지 말며
셋째, 지혜(智慧)에 의지하고 알음알이(識)에 의지하지 말며
넷째,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 .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낱낱이 살펴서 말씀하시고 이렇게 결론(結論)을 내려 주셨습니다.
『불자들아, 나는 육안(肉眼)을 가진 중생들을 위하여 이 네 가지 의지할 것을 말하였거니와 혜안(惡眼)이 있는 이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네 가지 의지할 것을 말하는 것이니 법이란 곧 법의 성품이요, 이치라 함은 여래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음이요, 지혜라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모두 부처 성품이 있다는 것이요, 요의라 함은 대승의 경전을 통달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법이라는 것은 법의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라는 것은 항상 머물러 변치 아니함을 말하며, 지혜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 성품이 있다는 것이고, 요의라 하는 것은 온갖 대승의 경전(經典)에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출가하지 않았어도 전륜성왕이 될 수 있는 출중한 장부의 기상을 지니고 있던 가비라국의 태자가 부귀영화와 공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출가를 하셨겠습니까? 부처님은 무엇을 찾고자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생팔고(人生八苦)속의 무상함 이셨습니다.
부처님은 인생이 무상(無常)한 것, 허망한 것이 아니라 무상한 것에 대한 목마름이 그렇게 간절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6년간의 고행 끝에 깨치신 연기법(緣起法)이 곧,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야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생멸(生滅)이 멸이(滅已)하면 적멸(寂滅)이 위락(爲樂)이니라.’입니다.
인생의 여덟 가지 큰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것은 결국, 인생의 무상한 이치를 알지 못해서 현상에 집착하고 매여서 생긴 것인데, 그 무상하다는 것을 깨치고 보니까 그 무상한 것이 연기법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법은 만들어졌다 없어졌다하는 것이 아니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이건, 생주이멸(生住異滅)이건 성주괴공(成住壞空)이건, 대소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것은 다 변해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깨우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멸하면 이것이 멸한다는 연기법 입니다. 그 연기법으로 인생을 들여다보니까 12연기입니다. 그 무명의 시작은 의심으로 부터 연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속당하고 속박당하며 얽매이고 빠지고 치우치며 집착하는 것을 들여다보니, 무지몽매함이 참자유를 가지고 살 수 없는 인생으로 전락시켜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멸(生滅)하는 현상을 제멸(諸滅)하는 수행의 덕목이 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네 가지 법에 의지해야 하는 항상 한 나(法身), 즐거운 나(涅槃), 참 나(佛), 깨끗한 나(法)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상락아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법(法)에 의지해야지,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출가(出家)라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을 피해서 설산수도 하듯이 어디론가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고 죽는 것, 즉 생사(生死)가 없는 영원한 삶을 찾아서 일체중생 모두에게 커다란 물음과 내던짐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히말라야 협곡에서 강을 건너려면, 야크(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소)에서 건조시킨 오줌통을 붙들고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 그것 손바닥만큼만 떼어 줬으면 좋겠다.”
그러자 강(江)을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손바닥만큼을 떼어주면 바람이 빠져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이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손톱만큼은 줄 수 있겠는가.”
“송곳 구멍만큼도 드릴 수 가 없겠습니다.”
송곳 구멍만큼이라도 떼어주면 바람이 빠질까요?  빠지지 않을까요? ‘그 정도쯤은 주어도 괜찮겠지’하는 생각으로 떼어준다면 그 사람은 협곡을 건너갈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래서 도를 닦는 이는 인정이 농후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비심이나 사랑은, 또 이타심이나 연민심은 선근과 지혜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동정심을 마치 자비요 사랑인양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정심은 동정이지 결코 자비심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이와 지혜있는 이의 다른 점은 분별력과 변별력의 차이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분별력으로 판단하려하고 지혜있는 이는 변별력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락아정의 자리에서 보면, 항상 한 나는 법신(法身)입니다. 무상한 나는 육신(四大肉身)입니다. 즐거워하는 나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 열반(涅槃)입니다. 괴로운 것은 번뇌입니다.
인간이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것은 탐진치 삼독심(三毒心) 때문입니다.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진심(嗔心)을 일으키는 그 마음만 없으면, 고통과 괴로움은 없습니다.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법의 성품은 깨끗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멸법은 증감(增減)이 있고 미추(美醜)가 있고 대소장단(大小長短)이 있습니다. 깨끗한 곳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不淨)한 것입니다.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분이 부처님 이십니다. 모든 중생들이 다 부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지식(알음알이)을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요의(了義)의 깊은 뜻을 설명하자면, 아이들이‘불교가 무엇인가요?’하고 물었을 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에게도 어린아이에게 말 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 더하기 하나만 둘 이라고 하면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집착입니다. 그 집착은 고통을 낳습니다. 구속되고 얽매이고 속박 당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고 아이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것만을 집착해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요의경(了義經)입니다.
즉, 참선하는 이들 가운데 참선만 고집하면 불요의 이고 염불하는 이가 염불이 좋은 줄은 알지만 염불만 고집하면 불요의(不了義)입니다.
염불이 좋은 이도 있습니다. 참선이 좋은 이도 있습니다. 또 절하는 게 좋은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릎 관절 다 망가진 사람에게 절 하는것이 최고라고 가르친다면, 그 사람의 무릎은 어떻게 될까요? 척추가 무너진 사람한테 참선이 최고라고 그것도 좌선만을 강요 하였다면 이것이 불요의인 것입니다.
부처님 네 가지 법에 의지해야할 가르침을 바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음 가운데 애착심을 떠난 이가 스님이고 사문입니다. 세속에 머물러 있으나 세속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출가입니다.
마음을 알고 근본을 통달해서 다함이 없는 법을 깨우쳐야 비로소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치신 분이 부처님이시고, 그것을 깨우치고자 노력하시는 분이 본분납자 이고,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선지식 입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래서 좋은 도량이요, 좋은 도반이며, 좋은 스승입니다.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요 인불학(人不學)이면 불지도(不知道)’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옥(玉)도 옥의 모습을 갖추려면 잘 다듬어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움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낱낱이 살펴주신 이 네 가지 의지해야할 가르침이 오늘의 문제요, 금생의 숙제이며, 세세생생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야 할 지침서가 되는 임진년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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