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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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행복론

승한스님 / 봉담선원장


나는 지금 행복한가? 요즘 들어 나는 그 생각을 자주 한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그 생각이 더 자주 든다. 아무래도 봄, 여름, 가을보다는 밤이 긴 겨울이 사색하고 명상하기에는 더 좋은 때이기 때문이리라.
옷 벗은 미루나무 우듬지 사이로 적막한 달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한밤중, 고요히 일어나 좌정하고 있으면 스스로에 대한 그 물음이 더 깊어진다. 나는 지금 과연 정말로 행복한가? 정말로 맑고 진실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고득락(離苦得樂)한 삶을 살고 있는가?
얼마 전 내가 알고 있는 신도 한 분이 가정적으로 큰 풍파를 겪었다. 이십 년 결혼생활 동안 큰 탈 없이 가정생활을 잘 해 오던 그의 아내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사교(邪敎)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 일로 그의 아내와 그는 일 년 넘게 신경전을 벌여오고 있었다. 그런데 급기야 얼마 전엔 그의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가버린 것이다.
수소문 끝에 아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그는 새벽 두 시가 넘는 시간에 경찰까지 동원해서 아내를 찾아왔다. 아내보다는 순박한 사람들을 그렇게 늦은 새벽 시간대까지 붙잡고 그릇된 교리로 미혹하고 있는 사교에 대한 분노로 그는 가슴이 용광로처럼 끌어 올랐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 앞에서 그 아내는 한 마리 추락한 새처럼 오들오들 떨며 하염없이 눈물짓고 있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그는 아내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이 밝도록 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뢰처럼 폭발하는 분노와 애증과 갈애를 참을 수가 없었다. 화를 억제하지 못한 그는 그곳에 입고 갔던 아내와 그의 옷을 마구 가위질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머리를 배코로 밀어버렸다. 차가운 냉수욕이 타오르는 가슴을 조금 식혀주었다. 비로소 정신이 조금 든 그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그 신도분에게 제일로 먼저 한 말은 “사랑과 이해”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과 이해만이 그들 부부를 구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참회를 주문했다. ‘나로 인해 그리도 긴 세월 동안 당신이 아파하더니 이제 내가 그 아픔을 되돌려 받고 있구나. 그렇게나마 당신이 위로와 평안을 찾았다니 참으로 고맙다. 사랑한다. 내가 잘못했다.’ 라면서 참으로 진실하게 참회를 하라고 했다.
나는 또 말했다. ‘현자와 중생의 차이는 즉흥적인 마음이니 모든 상황을 원칙과 법칙을 갖고 차분히 대응’하라고. 그렇게 할 때 ‘아무리 악마(사교)가 악마의 짓을 해도 다 이해가 된다’며, ‘그럴 때일수록 문수보살의 지혜와 관세음보살의 사랑으로 모든 상황을 큰 가슴으로 안으라’고.
나와 통화를 끝낸 그는 비 맞은 참새처럼 떨고 아내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단다. 그리고 가느다란 아내의 손을 잡았단다.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단다. 참으로 오랜만에 터져 나오는 참회의 눈물이었단다. 사랑과 이해의 오열이었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그가 자신의 아내를 그 사교 집단으로 내몬 것이었다. 자기중심적인 생활과 사고방식과 태도가 사이비 종교라는 삶의 마지막 경계선으로 그의 아내를 몰고 간 것이다.
그는 아내를 가슴에 안고 울었단다.
“그래, 여보. 다 내 잘못이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하고 산 업보로 당신이 그렇게 된 것이네. 부디 나를 용서하게. 내가 당신을 사이비 종교로 내몬 악마네. 내 진정으로 참회하니 부디 나를 용서하고 받아주게.”
한나절이 넘도록 그와 그의 아내는 울었단다. 딸도 울고 아들도 울었단다.
그 신도로부터 뒷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그날 한밤중에 일어나 방석 위에 좌정했다. 그리고 진실로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지금 정말로 행복하고 즐거운가? 이고득락하고 있는가?
문득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한 구절이 눈처럼 시리게 고여 들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행복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
법정 스님의 ‘행복론’ 한 토막도 시린 이마를 베고 지나갔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결국 두 분 다 행복론의 요지는 ‘바로 내 마음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하고 나에게 묻는 질문은 참으로 우문(愚問)임이 분명해졌다.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건만 나와 그 신도분은 있지도 않은 밖의 행복을 찾아 지금껏 먼 들판을 헤매고 다닌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신도분의 아내 역시 있지도 않은 밖의 행복을 찾아 끝내는 사이비 종교의 문까지 두드리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서로에게 커다란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고 만 것이다.
그 해 겨울 나는 때때로 한밤중의 방석에 좌정하고 앉아 우리 모두의 행복론을 가만히 되새김질해보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나의 스승인 용타 스님께서 일러주신 행복론의 기초논지를 겨울 달빛에 반추하며 시린 정수리로 내 안의 행복을 맑게 씻어보곤 했다.
귀신사 회주이자 행복마을 이사장인 용타 스님은 행복론의 기초논지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고, 행복이란 그냥 좋은 느낌이며, 그 행복의 주체는 우리이고, 그러므로 내 인생의 목적은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 모두의 행복’이라고.
어찌 보면 벵갈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말처럼, 우리들은 지금껏 집과 돈과 이름이 행복인줄 알고 걸어왔다. 그러나 지금 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내 자신이 이미 행복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또한 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에게 전화를 했던 그 신도분도 신도분의 아내도 자신들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행복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들 안에서 언제나 조용히 나부끼는 행복론의 기초논지를 새카맣게 잊어먹어 버리고 한 세월 무겁게 헤맨 것이다. 이제나마 그들 부부가 사랑과 이해와 참회로써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참된 행복을 되찾게 된 것은 올 겨울이 그들 부부에게 준 최고로 따뜻한 선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럴까. 요즘 들어 하는 한밤중의 좌정은 달빛보다 더 밝고 맑고 정수리가 시려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