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사자의 서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들으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이다.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불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순도 100%의 다이아몬드를 만날 때 우리도 헛깨비와 환(幻)을 벗고 진심(眞心)의 문을 열 수 있다. 이것은 <티벳 사자의 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 책은 1200년 전에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쓰여진 티베트 불교 최고의 고전이다.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못지않게 존경 받는 인물이다. 티베트불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구루린포체나 연화생보살로 불린다.
북인도 히말리야와 라다크, 네팔, 티베트 등을 순례하다 보면 파드마삼바바의 전설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천년 고찰과 암자의 상당수가 원효대사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현대의 사가들은 길도 차도 없던 옛날 어떻게 그 많은 첩첩산중 수백 곳에 원효대사가 다 절을 세웠겠느냐면서 원효대사의 제자들이 설립한 절들까지 포함됐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데 히말라야의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는 그의 수행처를 만나면 더욱 아이러니 해진다. 전설엔 파드마삼바바가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생사를 손바닥 안처럼 훤히 꿰뚫어본 대도인이니 어찌 부사의한 일이 없었으랴.
그런데 파드마삼바바가 수행한 곳들을 직접 순례해보니, 하나같이 바위산의 자연 동굴이다. 네팔 카트만두 인근의 파핑의 동굴에서 파드마삼바바의 흔적을 만난데 이어 재작년엔 북인도 라다크에서도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오지마을 스크루부찬에 갔다. 스크루부찬은 오지 마을 중에선 상당히 컸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처럼 그들만의 자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경사진 마을길을 30분 가량 오르니 스크루부찬곰파가 있다. 파드마삼바바가 머물며 수행한 바위굴이 있는 곳은 툭 시야가 트여있다. 그 동굴 안에 들어가 정좌하고 앉아 정진할 수 있었다.
이어 5천 미터가 넘는 창라를 넘어 초원의 바위산에 있던 탁톡곰파에 이르렀다. 어두운 동굴 안에 들어가니 구루린포체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잠시 고요히 앉아 그 불상을 바라보다가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 움직일 리 없는 고정의 불상이 마치 연기마냥 살아서 꿈틀대며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에너지의 흐름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유정과 무정,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리세계가 춤추듯 시연되고 있었다. 말로 형언키 어려운 에너지를 눈으로 목도하면서, 그 현상의 의미가 가슴에 오래도록 감돌았다. 그렇게 화현한 파드마삼바바의 화두로 그의 진의를 확철히 알기 위해 오면서 어느 화공이 직접 그린 파드마삼바바의 탕카를 사와 방에 걸어두었다. 그렇게 파드마삼바바와 함께하고 있다.
현상계를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늙음과 병과 죽음이다. 필자가 <은둔>에서 다뤘던 우리나라 근대의 고승들의 대부분도 어려서 부모를 비롯해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경험 한 뒤 생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출가했다.
내게도 영적으로 이나마 눈을 뜨게 한 것은 대부분이 고통과 죽음이었고, 불안이었고, 공포였다. 불안과 공포를 섣불리 없애주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또한 불안과 공포가 없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앞에 뜨거운 주전자가 놓여 있어도, 벼랑이 있어도, 물가에서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가라데로 세상의 주먹을 제패하면서 최강자를 자처했던 최배달도 대결을 할 때마다 한 번도 공포를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세인이 ‘절대강자’인 죽음 앞에서 어찌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것인가. 근대의 대선사 경허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마을에 들어갔다가 죽음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죽음 앞에서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자신의 한계를 처절히 깨닫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보통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불안과 공포가 그런 위험한 상황을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통과하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죽음에 대해 불안과 공포조차 갖지 않은 이들은 마지막 순간 평생 간과한 불안과 공포를 몇 배로 되갚음 당하며 까무러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해탈에 이른다’니!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류에게 최대의 구원서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영혼이 어떠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며, 사후세계는 어떻게 펼쳐지는 지를 텔레비전 화면처럼 상세히 보여준다. 그래서 환생의 굴레를 벗고 영원한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며, 환생하는 자는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그 신비의 해탈문을 열어준다.
이 경전이 192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를 통해 서구 세계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의 의학과 정신분석학이 이제 겨우 그 입구를 들여다보았을 뿐인 사후세계, 삶과 죽음, 환생과 해탈의 문제를 이 경전은 전혀 모순 없는 언어로 극명하게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 책의 서문에서 ‘서구의 철학과 종교가 따라갈 수 없는 가장 차원 높은 정신의 과학’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언제까지나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책의 위대한 점은 죽음 이후의 삶을 보여주는 점도 있지만, 이 삶의 환영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의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는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생사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조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을 내 마음이 만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