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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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와 아담스 이야기

- 세월호 영령들에게 부쳐 -


승한 스님
행복나눔 대중견성공동체 빠리사선원장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스미스와 아담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40대 중반인 이들은 고등학교 때 친구 사이였다.
어느 날 스미스는 권총 한 자루를 샀다. 아담스를 비롯한 고등학교 때 친구 열 명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사소했다. 세상 떠나는 마지막 길, 고등학교 때 자신을 괴롭혔던 아담스를 비롯한 열 명의 친구들에 대해 앙갚음을 하고 죽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많이 당하고 산 스미스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항상 외톨이로 지냈다. 그 때문인지 성격도 의기소침하게 변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이 잘 될 리 없었다. 하는 일마다 안 됐다. 일이 꼬일수록 인생은 더 꼬였다.
어느 날 스미스는 무의미한 인생을 끝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자살을 결심하고 결행하려는 순간, 문득 고등학교 때 자신을 괴롭혔던 아담스 등 열 명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친구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꼬이게 됐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 순간 스미스는 자기 혼자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그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활기찬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이고, 그랬으면 자신의 삶이 이토록 꼬이지 않고 훨씬 당당한 삶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아담스를 비롯한 열 명의 친구들을 차례로 먼저 죽인 뒤 자신도 죽기로 했다.
그 길로 권총을 산 스미스는 살인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열 명의 친구 가운데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친구를 맨 먼저 찾아가 아무도 몰래 쏴 죽였다. 내일은 두 번째 리스트에 오른 친구를 아무도 몰래 찾아가 쏴 죽일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를 타고 반가운 신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거기 스미스씨 댁 맞는가요?”
“그런데요.”
“그럼 혹시 스미스씨인가요?”
“그런데요.”
“아, 스미스! 반가워. 나 고등학교 같이 다녔던 아담스인데 기억하겠는가?”
스미스는 당연히 아담스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이고 떠날 열 명의 살인 리스트에 오른 이름이니까. 스미스는 무거운 저음으로 대답했다.
“암, 기억하지.”
“그렇구먼. 나도 늘 자네를 생각하고 지냈다네. 그래 잘 살고 있지?”
“……”
“그런데 말이지, 내가 오늘 자네한테 사과할 게 있어 물어물어 이렇게 전화했다네. 사실은 말이지 내가 고등학교 때 철이 없어서 자네를 참 많이 괴롭혔네. 그 일로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네. 진작부터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연락처를 알지 못해 오늘에야 전화를 하게 됐다네. 그동안 많이 미안했네. 철없던 나를 부디 용서해주게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스미스는 맥이 탁 풀렸다. 수십 년 묵은 원한과 분노가 액체처럼 녹아내리며 온몸에서 살의殺意가 빠져나갔던 것이다.
수화기를 떨어뜨린 채 한동안 묵묵히 서 있던 스미스는 수화기를 다시 들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구먼. 사실 그때 나를 괴롭혔던 자네들 열 명을 차례대로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어제 권총을 샀다네. 그리고 방금 한 명을 죽이고 왔지. 전화 줘서 고맙네.”
전화를 끊은 스미스는 그 길로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다. 그리고 복역하는 동안 삶의 의욕을 되찾아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 대목에서 스미스를 살리고, 아담스를 살리고, 나머지 여덟 명의 친구를 살린 건 누구일까? 무엇일까? 스미스 자신일까? 아담스일까? 아담스의 전화일까?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 무엇도 아니었다. 단 두 글자, ‘사과’였다. 비록 한 명이 죽긴 했지만 아담스의 사과 한 마디가 수십 년 동안 묵은 원한과 분노를 녹이고 스미스는 물론 아담스 자신과 친구들 여덟 명의 목숨을 구해낸 것이다.
그렇다. 예화에서 본 것처럼 모든 인간관계는 ‘나’와 ‘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나’와 ‘너’는 그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받는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주고받는 관계 또한 아주 단순하다. 서로 플러스(+)적인 것을 주고받거나, 아니면 마이너스(-)적인 것을 주고받는 두 가지 관계밖에 없다. 내가 플러스적인 것을 주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상대방이 마이너스적인 것을 줄 리 없고, 마이너스적인 것을 주는데 상대방이 플러스적인 것으로 화답할 리 없다.
헌데, 문제는 거기에 있다. 플러스적인 것은 증발성이 강해 상대방의 마음속에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마이너스적인 것은 가라앉는 성분이 강해 상대방의 가슴에 석탄가스처럼 깊이깊이 매장된다. 그러다 어느 날 도저히 압력을 견딜 수 없으면 스미스처럼 폭발해버리고 만다.
관계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마이너스 손님(미움, 원한, 시기, 질투)을 우리 안에 무료로 장기 투숙시켜놓고 살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는 무료로 그 손님들에게 맛있는 밥과 영양소까지 주고 있다. 그 덕에 마이너스 무료 장기 투숙 손님들은 우리 마음의 여인숙을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닌다.
‘사과’는 나는 물론 상대방의 마음속에서 그런 불청객들을 시원하게 추방시키는 길이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을 먼저 해방구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사과의 날’도 있다. 둘(2)이서 서로서로 ‘사(4)과’ 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농협과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가 매년 10월 24일을 ‘사과의 날(Apple Day)’로 지정해놓은 것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 31일째. 그런데도 아직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사과’ 하는 사람 없다. 그 탓에 진도 앞바다 차가운 맹골수도엔 아직도 십 수 명의 어린 눈들이 눈을 감지 못한 채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다.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죄를 뒤집어쓴 채 세월호는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오늘도 맹골수도에 모로 누워 있다. 이젠 죄 없는 ‘세월’호를 위해서라도 끝없는
‘세월’ 우리 모두 ‘사과’를 하고 살 때이다.
누가 누구도 나무날 수 없다.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피해자이고 모두가 세월호 아닌가?
나와 너의 세월호를 하루 빨리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사과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위해서라도 흘러가는 세월 앞에 용서를 빌고 새로운 상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사과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