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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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의지하여 의리를 지키다

원진국사(元.國師, 1340?~1415)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동서고금의 역사를 읽다보면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처세술을 구사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전란이나 왕조교체와 같은 난세亂世에는 그들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벌거벗은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의리를 지키거나 아니면 배신하거나 크게 둘 중의 하나다.
스님의 법명은 세염洗染, 호는 청간淸簡이니, 출가 전의 이름은 조한룡이다. 고려 말과 조선 전기를 살다 간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8대에 이르도록 국학國學에서 학문을 탐구할 만큼 고귀하고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 벼슬 또한 고려 조정에서 정2품의 고위관직인 평장사平章事와 복야伏射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이러한 집안은 안팎의 내란이나 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해도 그들이 대대로 누려왔던 권력이나 부귀영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님의 아버지는 창녕 조씨 조정통曺精通이며, 슬하에는 용龍자 돌림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셋째인 한룡漢龍은, 맏형 경룡景龍과 함께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이듬해엔 나머지 삼형제마저 모두 등과登科하였다. 때문에 그들이 태어난 마을을 다섯 용이 났다하여 오룡동五龍洞이라고 할 만큼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더욱이 한룡은 『서경』에 나오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는 여섯 글자를 허리띠에 새겨 다닐 만큼 고려왕조에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천시天時와 인간 일이란 알 수 없는 것
다시 저쪽을 향해 거룩한 임금께 절하네
이 사이 진취眞趣 적다고 말하지 마소
산 높은 곳곳에 물소리 끊이지 않네.


『금강경』은 “일체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하라.(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고 가르치고 있다. 인생사가 물거품이나 그림자, 이슬과 번개와 같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왕조가 망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들은 짙은 안개와 격랑에 갇힌 시간을 더듬어 다음 살길을 찾기 마련이다. 조씨 집안은 조선왕조에서도 다행히 벼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룡만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조선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고려의  멸망을 한탄한 서견徐甄과 함께 금천衿川에서 은둔한 채 살아갔다. 서견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하여 정몽주鄭夢周·강회백姜淮伯·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상소하여 혁명세력인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오사충吳思忠 등을 탄핵하다가 정몽주가 격살 당하자 김진양·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은둔하였으며, 한 때는 이색李穡·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 끝까지 고려에 절개를 지킨 신하들과 함께 정선旌善에 모여 시와 술로 서로를 위로하며 고려를 사모한 인물이다.
위의 시는 한룡이 ‘천년의 신도神都가 아득히 막혔다’는 서견의 시에 화답하여 읊은 시이다. 예컨대 천시天時와 인간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이미 멸망한 고려의 군왕에게 절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시를 살핀 관원官員이 죄를 묻고자 했지만, 왕은 “백이伯夷같은 무리들인데 어찌 꼭 치죄治罪한단 말인가”하고 풀어주었다. 백이는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키자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치욕이라며 수양산에 은거하며 고비(미薇, 산나물의 일종)를 꺾어 먹다가 숙제와 함께 굶주려 죽은 인물이다. 왕은 조한룡이 비록 새로운 왕조와 뜻을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 충절을 칭송한 것이다.


네가 비록 고려 조정의 충신이기는 하나 지금 네 어미가 아직 살아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부모가 물려준 몸뚱이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냐. 집안이 이제 멸망하였구나.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산단 말이냐.


출가한 조한룡이 세염스님이 되어 고향을 찾았을 때 그를 본 어머니의 한탄이다. 그러자 한룡은 “불충과 불효를 하는 것보다 불충은 하되 어머니의 뜻만은 받드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고 다시 머리를 기르고 관직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3품 당상관직인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종3품從三品 무관武官의 품계品階인 보의장군保義將軍의 소임도 맡았다. 고위관직이다. 조정에서는 1406년(태종 6) 그를 위해 ‘보의장군효자비保義將軍孝子碑’를 세웠다. 그의 고려에 대한 절개와 함께 어머니를 위해 은둔생활을 접고 다시 세속으로 나온 것에 대한 세간의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전라남도 나주 남평땅 오룡동五龍洞 들머리에는 고려에는 충성했고, 조선에서는 효도를 다한 그를 기려 ‘려충선효麗忠鮮孝 보의장군保義將軍 조한룡曺漢龍’이라고 새긴 효자리비가 남아있다. 
이로부터 3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다시 출가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가야산으로 들어갔고, 표주박 하나와 허름한 누더기 한 벌만 가지고 호남 영암 땅의 도갑사道岬寺를 거쳐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 그 후 고향인 나주 불회사佛會寺에 머물면서 난리를 겪어 쇠락한 절을 중건하기 시작하였다. 스님 때문에 목숨을 건진 호랑이의 도움으로 중창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는 설화도 전해오고 있다.


인간세계에 귀양 온 지 어언 80년
무정한 백발만 머리에 가득하네.
천지도 한계 있는데 내 집은 어디인고.
해와 달이 찬란하게 빛나니 세상이 아름답네.
동쪽 고갯마루 벗어나면 모든 감회 새롭고
남쪽 호남으로 돌아가면 근심이 사라지네.
임금님! 스님 생활 고달프다 말하지 마소.
못난 소납은 머리 기를 생각 없소이다.


호남의 순찰사가 스님이 출가하기 전 은둔한 채 살고 있었던 조한룡임을 알아보고 조정에 보고하자 왕 앞에 불려와 왕명으로 읊은 시이다. 그 내용으로 보아 왕은 그를 알아보고 환속하기를 은근히 종용한다. 세염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노자와 부처님의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머리를 길렀지만, 깎은 머리를 다시는 기를 생각이 없다고 천명한다. 더욱이 왕이 출가수행자의 생활이 고달플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자 의연하기까지 했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에서 그것도 공자와 맹자의 도를 신봉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불교는 한나라의 신민臣民으로서 지켜야 할 충성과 효도를 저버린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 채 무위도식하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세종은 세염스님을 국사國師로 추증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마침내 원진국사元.國師에 추증되었다. 아울러 왕이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도 돈과 재물을 희사하여 불회사는 큰 어려움 없이 중창불사를 마칠 수 있었다.
원진국사는 고려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사이에서 고려에 대한 충절로 마음이 선문禪門에서 놀고 현묘한 도에 마음을 붙인 것이다. 주어진 채 살았던 것이 아니고 선택한 삶을 살았다.
이와 같이 고려 말과 조선 건국 당시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출가를 선택했는가 하면 불교탄압을 피해 비승비속非僧非俗하는 무리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