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중앙승가대 총장이셨던 종범 스님께서 법문 중에 “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인데, 사람들은 부귀영화富貴榮華만을 바라고 있다.” 하셨습니다.
불교는 종교가 세상에 윤활유와 비타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론입니다.
그 종교의 시원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불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권합니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에 이르기를, “불교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자정기의自淨其意하면 시제불교是諸佛教니라.”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실천하라. 스스로 그 뜻을 헤아려 살필 줄 알면,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는 있으나 평생 살아온 사람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악은 짓지 않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라는 뜻입니다.
자정기의하면 시제불교니라, 그 뜻을 스스로 헤아리고 살펴서 행동할 줄 알면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란분절盂蘭盆節에 49일 지장기도地藏祈禱를 올리고 있는 기간입니다.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아미타경』에 부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사리불이여, 저 부처님 국토에는 가벼운 바람이 불면 보배 나무와 보배 그물에서 미묘한 소리가 나는 것이 마치 백 천 가지 풍류를 한꺼번에 듣는 듯해서 이 소리를 듣는 이는 저절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고 스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저 부처님 국토는 이러한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사리불이여, 저 부처님을 어째서 아미타阿彌陀라 하느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이라 하는데, “사리불이여, 저 부처님의 광명이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비추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으므로 아미타라 하느니라.”
선근善根이 지중한 사람이 지혜롭게 살게 되면 변별력辨別力이 증장해진다하였습니다. 그 근본根本은 바로 보리심菩提心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입니다.
어느 불자가 「별이 진다 네」라는 노랫말을 유튜브 영상과 함께 카톡으로 보내왔기에 이렇게 답장을 해주었습니다.
“밝음과 어둠 사이에는 우리들의 지각작용에 의해서 별이 빛나기도 하고, 멀리 있는 별은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밝은 대낮에는 별빛이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그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한여름이어서 통도사 연방죽에는 연꽃이 만발하고 있을 것입니다. 엊그제 우크라이나 구호성금을 전달하기 위해 조계사에 갔었는데, 조계사 마당에도 함지박 속 연꽃들이 활짝 피어 조계사 뜰을 장엄하고 있었습니다.
활짝 핀 연꽃의 아름다움이야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연꽃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연꽃은 아무리 날이 흐려도 온도가 맞으면 꽃을 피우고, 아무리 주위가 밝아도 달 밝은 밤에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세상에 태어난 이는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늙으면 죽음이 온다. 살아 있는 자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 익은 과일은 땅에 빨리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와 같이 태어난 자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 젊은이도, 노인도, 어리석은 이도, 지혜로운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린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들은 죽음에 붙잡혀 저 세상으로 가고 있지만, 부모도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누구도 죽음으로 가는 이들을 구하지 못한다. 보라, 모든 이들은 애태우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사라져 간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를 “젊음과 건강과 목숨”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이라 해도 젊음과 건강과 목숨을 한없이 지키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여서 두렵고 무서운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해 가는 업業을 지으며 육도六道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갓 오브 이집트>라는 서양영화에 보면, 육도윤회六道輪廻에 얽매여서 두렵고 무서운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해 가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갓 오브 이집트>는 인간이 신과 공존하는 시대를 조명하는 이집트 제국에서 피라미드 안에서 벌어지는 신들이 지옥과 아수라의 세계를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인과因果로 윤회輪廻하는 인간들이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존재들과 파라오가 활동하는 시대를 그린 영화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신, 왕인 아버지 신, 친형을 헤치고 왕이 된 삼촌과 천신만고로 왕과 싸워야 하는 조카는 모두 천신天神들입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당天堂에서 서로를 죽이며 사는 그런 전쟁터에 있는 이들입니다.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에 욕망으로 불타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입니다.
지혜가 없는 부나방이 불빛을 꽃으로 보고 뛰어들어 타 죽는 것처럼, 그 혼돈에서 왕이 된 신神은 인간인 청년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떠나가려 합니다.
그 젊은 청년과 죽은 자야의 간절한 사랑을 바라보면서 신과의 약속을 대신해 주기 위해서 신통력의 상징인 팔찌까지 청년에게 풀어주고 떠난, 서쪽을 다스리던 여신女神 하토르를 찾아가고자 하는 왕은 나라를 걱정하는 청년 ‘벡’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이집트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은 선행과 연민과 너그러움이다.” 좋은 세상에 갈 수 있는 일은 제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선행을 베풀고 연민심으로 서로 살피고 너그러움으로 포용해야 좋은 세상에 갈 수 있다고 말하며 여신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집착이 많으면 영혼은 육신을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선한 업을 지어 천상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이라는 육도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인선과善因善果입니다. 선한 업을 지어서 인간 세상보다 나은 천상에 태어나도 육도의 윤회를 마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윤회하는 일은 자신의 업장이 아직 소멸되지 않아서 그 업대로 다시 나고 죽는 일을 겪어야 하고, 그것을 중생들은 대다수가 고통과 괴로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영가들은 비록 극심한 고통은 겪지 않더라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여 번뇌와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돌아가신 영가를 위해 우란분절일에 49일 지장기도를 올리면서도, 안목이 부족해서 영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디에선가 살아가고 있음을 확실하게 믿고, 나고 죽는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신심으로 기도에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주굉袾宏 스님은 『죽창수필竹窓隨筆』에서 “좋은 도량에서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좋은 도반인 벗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으면 금생今生에 공부를 마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에게 들려주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에 집착해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벗을 가까이하는 이익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면 오히려 그 말이 독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누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 했는데 뭐 따질 거 있나?’ 이렇게 생각하고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경책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현묘한 옥玉이라도 그 옥을 다듬어 구슬로 만들었을 때 그 옥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외형은 사람이어도 다 사람은 아닙니다. 인간다움을 잊지 않을 때, 그를 일러 사람다운 현자賢者라 할 것입니다.
벗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훌륭한 벗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재물이나 이익을 좇는 사람들은 나쁜 벗이요, 선행을 서로 권하는 이가 좋은 벗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수행자의 길로 인도하고 최상승의 부처님 법을 보여주며 나의 등불이 되고 나의 눈이 되고 나의 길잡이가 되는 이가 참된 선지식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살았으면 합니다.
“사리불이여, 저 부처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문 제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라한들이라, 어떠한 수학으로도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보살대중들도 또한 그러하다. 사리불이여, 저 부처님 국토는 이러한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졌느니라.”
부처님을 믿고 열심히 보리심을 증장시킬 수 있는 불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