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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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사임선언 소식을 듣고

최윤필
한국일보 선임기자


“나는 세상으로부터 잊힐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와 언제나 함께할 것이며 여러분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난 2월 12일(한국 시각) 돌연 사임을 선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86)가 15일 로마 교구 성직자들 앞에서 행한 즉석연설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교황은 자신의 선택이 교회를 위한 자유의지의 결과라며, 가톨릭교회의 쇄신을 촉구했다고 외신은 전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저는 잊혀져갈 자신의 운명 앞에 의연하고자 다짐하고 또 노력하는 한 유한자의 고독한 내면을 그려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잊힌다는 것은 일몰 뒤의 어둠처럼 공적인 삶이 끝난 뒤 누구나 맞이해야 할 자연스러운 귀결일 테지만, 그 의미를 사회적 죽음이라는 차원에 놓고 본다면 교황의 잊힘은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라는 직위가 지니는 공적인 삶의 크기와 양태가 어떠할지 저는 물론 알지 못하지만 짐작컨대 어마어마한 자장 안에 놓여있을 것입니다.
유력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에게 따라다니는 스포트라이트의 밀도와는 달리 그의 자리는 신이 부여하고 세속이 공인한 신성의 권위가 하나로 모이는 자리입니다. 온 존재를 휘감고 있던 그 거대한 자장이 사라진 뒤의 공백과, 시간과 함께 마모되어 갈 기억의 진공을 예감하며 그는 혼잣말로 다짐하듯 이웃을 향해 “나는 세상으로부터 잊힐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을 위한 공적 봉사라는 지엄한 사명과 세계 가톨릭교회와 신도들을 향한 책임의 막중함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그 짐(권한과 의무)들을 내려놓기로 결심하기까지 그가 겪었을 인간적 고뇌와 번민과 두려움과 고독을 저는 저 처연한 한 마디에서 느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례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교황 역시,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8고苦의 짐을 감당해왔을 인간일 테니 말입니다.
참견하고 소식을 캐고 말 옮기기를 업으로 삼는 언론과 뭇 세인들은 교황의 공식 발표 뒤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 속사정을 캐묻고 짐작하고 전하느라 분주합니다. 다음 교황의 선출 일정과 예상되는 후임의 면면들을 살펴보는 일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도박사들은 노벨상 수상자나 월드컵 우승국을 점치듯 확률의 숫자로 저마다의 저울 눈금을 내보이기도 합니다. 앞선 물결을 덮으며 잦아들고 또 이어지는 파도처럼, 그렇게 바티칸의 시간은 세상의 세월과 함께 이어져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그의 말처럼, 잊혀져갈 것입니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심신의 노쇠입니다. 퇴위 발표문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고령의 내 기력으로는 빠른 변화와 신앙에 대한 의문으로 흔들리는 오늘의 성聖교회를 다스리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직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다”고 밝혔습니다. 교황의 사임 발표 직후 AP통신은 2005년 84세로 선종한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야기를 환기하는 기사를 타전했습니다. 파킨슨병과 싸워야 했던 바오로 2세는 당신의 재임 마지막 몇 해 동안 걷거나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노쇠해, 당시 가톨릭교회가 직면했던 사제 성추문 사건 등 난관들을 해쳐나가는 데 큰 힘을 쏟지 못했습니다. 현 교황은 추기경으로서 전임 교황이 겪던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라고 외신은 추측했습니다.
종신직인 교황의 사임은 1415년 그레고리 12세 이후 598년 만의 일입니다. 그간의 역대 교황들이 생과 신의 사역을 함께 놓았다는 의미이고, 운명할 때까지 직분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그대로 숭고합니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의 선택 역시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무엇이냐는 것보다 뜻이 향하는 곳이 어디이며, 귀결이 어떠했냐는 것을 살펴 헤아리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인간의 고뇌를 생노병사의 사고四苦에 더해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일, 미운 자와 만나는 일,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일, 심신이 생각대로 통제되지 않는 일까지 해서 팔고八苦라 했습니다. 백팔번뇌는 사고와 팔고에서 가지 뻗어 나오는 걸 겁니다. 그리고 저 모든 고통을 거친 일상의 언어로 뭉뚱그려 본다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원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우리의 뜻과는 맞서거나 무관한 일이니 말입니다. 저 고통에서 놓여나는 길이 불도佛道일 것이고, 그 길이 이끄는 자리의 끄트머리쯤에서 해탈과 성불의 빛이 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28일 퇴임 후 바티칸 내의 한 봉쇄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라고 합니다. 수도자로서 정한 거처가 아닌 만큼 그 ‘봉쇄’가 무문관의 계율처럼 운신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황청의 공적인 영역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잊혀져감’의 물결에 순응하겠다는 의지이자 자계自戒일 것입니다. 그 길이 아득히 부처의 길과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 하나의 길에 붙은 다른 언어의 표지판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외람된 짓이겠지만, 교황의 저 고뇌와 결단의 궤적 위에 미미한 ‘나’의 현재와 미래를 대비시켜 보게도 됩니다.
교황의 자리는 드높이 있지만 넓게는 성직의 자리에 속합니다. 신성과 세속의 중간 자리, 매개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그 자리는 언제나 세속의 더러움 속에 놓여 있습니다. 교황청도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 속에 마련된 공간이고 교황 역시 그 공간의 한 존재입니다. 종교와 권력에 대해 냉소적인 이들은 바티칸의 이름 뒤에 이탈리아 파시즘과의 어두운 유착과 거래의 역사를 병풍처럼 둘러치곤 합니다. 영화 <대부 3>에서 실감나게 까발려졌듯, 바티칸 은행의 부정부패와 마피아와의 검은 거래 의혹도 단순히 의혹 수준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 정황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해 교황청과 세계 언론을 뒤흔들었던 교황청 비밀문건 유출사건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베네딕토 16세의 이름 앞에 ‘독단적 보수주의자’나 ‘냉정한 교조주의자’라는 영예롭지 못한 수식어가 심심찮게 따라다녔던 것도 사실입니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배격하는 전투적 신앙인으로, 이슬람교에 대한 폄훼성 발언과 성 차별적 인식 등으로 하여 오점을 남겼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의 사임은 역설적으로, 저런 맥락 속에서 도드라지게 솟아난 봉우리여서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쇠퇴 추세에 맞서 전통적 교권 가치의 회복에 힘쓴 교황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는 현대 신앙이 직면한 어두운 운명을 우려하며, 사람들이 상품을 고르듯 종교를 가볍게 선택하고 소비하고 또 그런 종교를 통해 이윤을 내는 이들도 생겨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종교로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우려는 우려가 아닌 현대 종교 현실의 일부라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추세는 두려울 정도로 악화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합니다.
바티칸 교황청의 현실과 교황 사임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관점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중요한 관점이 그의 저 우려와 현실 인식 속에 있고, 그것은 비단 가톨릭교회에게만 요구되는 관점은 아닐 것입니다.
교황의 인간적 고뇌와 결단 위에 유한자인 우리 모두가, 또 한국불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