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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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과 반대

성운星雲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대중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어떤 사람들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만 매달려 집착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매사에 선입관을 갖고 보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일의 시비곡직是非曲直에 상관없이 찬성을 위한 찬성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찬성을 위한 찬성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 사람이 때릴 때 때리고 욕할 때 욕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용감한 행동입니까!”
사람을 때리고, 욕하는 걸 그도 찬성하는 겁니다.
“지금 부정축재하지 않은 관리가 없는데, 그가 조금 이익을 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정상이랄 수 있습니다.”
횡령도 찬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에는 첩을 여러 명 두었는데, 중혼重婚을 하여 여자가 하나 더 있다고 무슨 대수입니까?”
“그가 잘 먹고 빈둥거리는 것도 그의 복이지, 당신이 뭘 어쩌겠습니까?” 이처럼 시비가 불분명하고 일이 옳건 그르건 상관없이 임의대로 타협하고, 찬성한다면 사회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으며 인생이 어찌 깨끗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를 위해 반대하는 자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직선이고, 평탄하며, 운전하기 좋은 도로는 계속 달리다보면 교통사고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지 말아야 할까요?
선박·비행기 제조를 반대하는 사람은 비행기는 공중에서 사고를 내기 쉽고, 선박은 바다 속에 침몰되기 쉽다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비행기나 선박을 만들지 말아야 할까요?
고층 건물의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지진발생시 큰 건물이 비교적 위험해서 사상자가 더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고층빌딩도 짓지 말아야 할까요?
지식을 반대하는 자는 지식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더 많아진다고 하고, 교육을 반대하는 자는 고등교육은 단지 할 일 없는 사람들만 길러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겐 정말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교육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가령 밥을 먹는 것이 식량 낭비라 한다면, 우리는 밥을 먹지 말아야 합니까? 잠자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한다면, 사람은 잠을 자지 말아야 합니까? 자녀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가산을 탕진한다면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 필요 없단 말씀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일이 발생했을 때 반대나 찬성의 의견을 계속 고집하는 것에는 이유야 많지만 시비와 좋고 그름은 이성理性을 거치지 않은 것입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관계없이 모두 순응할 가치가 없습니다.
단체에서도 찬성과 반대를 결정하기 위해 민주적 표결을 사용해서 다수를 얻는 것으로 결정하고 전체의 뜻이라 얘기합니다. 비록 찬성과 반대가 다수라고 해도 아주 좋은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아주 나쁜 것도 아닙니다.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다수로 결정하는 것이니 비교적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은 선하고 좋은 것이면 모두에게 유익하고,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므로 모두 찬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의 이익, 눈앞의 이익, 혹은 해가 많고 이익은 적은 것, 혹은 국가나 사회에 이롭지 못한 것은 모두 반대해야 합니다.
찬성해야 할 때 찬성을 하고, 반대해야 할 때 반성해야 합니다.
타고난 지각[良知]과 정의正義에 의거하고 자비심과 지혜의 힘을 보태 결정해야 찬성과 반대의 공정한 옳고 그름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대만에서는 ‘핵사核四’를 건설 중지냐 계속 건축이냐를 놓고 다툼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단계까지 와 있습니다.
다행히 여야의 협상과 민의에 호소하여 2001년 1월 31일 오전 11시, 투표수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잠시 소감을 위와 같이 피력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