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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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한 시절에 움켜쥔 본분사本分事

정관 일선(靜觀 一禪, 1533~1608)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정관 일선은 청허 휴정의 제자이다. 일선은 법명이고, 정관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충청남도 연산連山에서 태어났고, 성은 곽씨郭氏이다. 15세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닦고 두루 배워 모든 교법敎法의 묘한 뜻을 널리 통하였다.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크게 명성이 드러났지만, 스스로는 안개같이 보았다고 한다. 정관은 1547년(명종 2년) 백하 선운白霞禪雲에게서 ..법화경..을 배우고 그의 법화사상法華思想을 전수하였다. 묘각 수미妙覺守眉스님을 정련 법준淨蓮法俊스님이 이었고, 정련을 이은 스님이 백하스님이었다. 정관은 그 뒤 법화신앙에 심취하여 ..법화경..을 부지런히 독송하였고, 그 공덕의 뛰어남을 역설하는 한편, 시주를 얻어 3,000권의 종이를 마련하고 1,000부의 경전을 인출하여 보시布施하는 등 경전 유포에 큰 공훈을 남겼다. 그 뒤에는 묘향산으로 가서 청허 휴정 문하에서 말 밖에 마음을 전하는 법을 얻고는 드디어 빛을 가리고 자취를 감추어 날마다 안으로 비추어 보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점차 아름다운 소문이 밖으로 퍼져 무지無知를 깨치려는 사람들이 그의 품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회상會上에는 언제나 수백 명이 있었는데, 무릇 해동 불법佛法의 근간을 높이고 설법하는 사람과 교단敎壇의 높은 이들도 모두 옷섶을 여미며 추앙하고 복종하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다가 덕유산 백련사白蓮社로 옮겨와 수행하다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정관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며 홀로 수행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먼 길을 떠나시는 행색行色이 어떠십니까. 유유悠悠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아우의 본래 생각은 존형尊兄과 상종하여 풍악산楓嶽山에서 의마依麻의 이익을 얻으려 하였사온데, 늙어서 절뚝거리는 병이 있는 데다 또 길이 멀다 하니 뜻을 이루지 못해 수탄愁嘆하는 마음이 세월과 함께 깊어만 갈 뿐입니다.
사명 유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정관이 편지를 쓴 것이다. 정관은 사형師兄이 적진으로 간다니 부질없이 생각만 많을 뿐이었다. 일찍이 풍악산에서 사명당과 함께 삼대에 의지한 것과 같이 든든하게 한 시절을 수행하면서 살고자 하였지만, 늙고 몸이 불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해 근심과 탄식 속에서 세월이 갔다는 것이다. 사명 유정 역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전장戰場이 아닌 궁벽진 산속의 법당이었지만, 시절인연은 그를 수행자로 살게끔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글은 일찍이 사명당과 함께하지 못했음을 한탄했으며, 전장戰場으로 가는 사명당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때문에 정관은 글의 말미에 “삼가 비옵건대 부처님의 특별한 가피를 받아 잘 가셨다 잘 오십시오. 만일 내가 그동안에 죽지 않으면, 깃발을 돌리는 날을 기다려 나아가 뵈옵고 축하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사명당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는 더욱 애틋하다.


그윽한 암자에 홀로 있는 늙고 병든 몸
멀리 고인故人 생각하나니 기약이 아득하다.
밤 골짝의 잔나비 우는 곳에 시름은 일어나고
구름 속 산의 해가 저물 때 창자를 끊네
길은 멀지만 빈번한 꿈이라 돌아가기 쉽겠고
바다가 넓으매 외로운 돛배라 가기 응당 더디리.
은근히 못내 그리는 그 뜻을 갚기 위하여
부디 빨리 돌아와 한 번 흥겹게 웃으시기 바라네.


그 때문이었을까. 정관은 스님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아 아. 법法이 쇠했는데 세상까지 극히 어지러워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고 스님들도 편히 살 수 없으며, 적들의 잔악한 행패에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더욱 슬픈 일은 스님이 속인俗人의 옷을 입고 군사軍士로 몰려나가 동서로 쫓아다니면서 혹은 적의 손에 죽고, 혹은 속가俗家로 도망치니 속세의 습관은 여전히 다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출가出家의 본뜻을 잊어버리고 계행戒行을 아주 폐하여 빈 이름을 구하여 불처럼 달리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선픙禪風이 장차 그치게 될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정관집靜觀集』의「도대장 연형都大將年兄께 올림」중에서


정관이 누구에게 쓴 글인지 알 수 없지만, 앞뒤 문맥으로 살폈을 때 사명당에게 쓴 글로 추정된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스님들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의승군義僧軍으로 나아가 전쟁에 참여함을 보고 승단僧團의 장래를 깊이 걱정하였고,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스님의 본분인가에 대하여 개탄하였다. 예컨대 스님이 속인의 옷을 입고 전쟁에 참여하여 동서로 쫓아다녀 적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속가로 도망쳐 출가의 정신이나 각오를 잊어버리고 마침내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어기고 술과 육식을 하고, 처자식을 거느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개인의 차원을 넘어 불교의 운명과도 직결되었다.


조선의 불교는 탄압과 소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과 자연재해 그리고 굶주림 등으로 승가僧伽가 위기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스님들이 산성을 쌓거나 토산물을 채취하는 온갖 잡역雜役에 동원되는 것은 스님들이 환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위기는 경전을 공부하고 독송하는 교학敎學과 선 수행이 쇠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을 비는 기복불교祈福佛敎와 미신迷信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백성을 혹세무민하는 병폐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청허 휴정과 제자 편양 언기가 조선불교의 법통法統과 법맥法脈을 세우고 확립하고자 진력한 것에서도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융복(戎服, 군복 혹은 관복)을 벗고 다시 납의衲衣를 걸치시고, 깊은 산에 들어가 종적을 끊고는 시냇물을 움켜 마시고 비름을 삶아 먹으면서 선정禪定의 물을 다시 맑히고 슬기의 달을 거듭 밝히어 반야般若의 인자한 배에 시원히 올라 보리菩提의 저 언덕에 바로 이르시기를 진심으로 비는 것입니다.
정관은 또한, 유정惟政에게 한시바삐 관복을 벗고 승가僧家의 본분을 다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는 육조 혜능六祖惠能이 그 도가 천하에 퍼졌지만, 천자天子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고, 승조僧祖는 그 덕이 일세에 높았지만, 위왕魏王의 부름을 거절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들에게 죄를 주기보다는 더욱 존경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정관은 전란으로 텅 빈 산을 지키면서 수행하였고, 수행자들이 다시 산으로 돌아오기를 독려하였다. 그는 신료나 유학자들이 불교를 천대했던 시대를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조선의 불교인이었으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고자 눈을 감지 않았던 눈 푸른 수좌였다. 
정관은 1608년 가을에 병을 얻어 덕유산 백련사白蓮社에서 입적하였다.


묘한 성불은 무엇에나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파랑 노랑 빨강 하양 갖가지의 형상이다.
산은 원래 묵묵하고 하늘은 원래 퍼렇고
물은 스스로 말갛고 달은 스스로 밝다.
봄이 오면 제비는 왔다가 가을이면 다시 가고
밤이 깊으면 사람은 자다가 새벽이면 다시 깬다.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 짧은 것 천진天眞의 몸이거니
언덕 위에 농부의 노래가 바로 이 태평이네.
- 정관 일선의 시「본원자성 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