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영 인문정신연구소 네트워커·자유기고가
쿠바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나는 낙관적인 운명론자’라고 말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운명이고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자기는 그 일이 어렵지 않고 즐겁기까지 하다는 말이겠다. 윤남진, 한주영 씨 부부가 사는 모습이 꼭 이와 닮았다. ‘부자 되세요!’ 하는 광고가 히트를 치는 우리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과 거리가 먼, 아니 가난이 뻔히 내다보이는, 그렇다고 빛나는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닌, 불교운동에 몸담고 있다. 부인 한주영 씨는 선학원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일하고 있다. 윤남진 씨는 실천불교승가회, 전국불교운동연합, 조계종 총무원과 포교원, 참여불교 재가연대,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 길로 내몬 것일까. “제 부모님이 워낙 불심이 돈독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불교가 최상의 진리다’ ‘불교 이상의 위대한 가르침은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요.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불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배우고 출가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그전까지 제가 알고 있던 불교는 관념적이랄까 형이상학적인 거였어요. 그때 마침 초기불교 바람이 불고, 보살사상연구회가 생기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회참여적인 불교를 접하게 됐어요. 그때 출가 수행자에서 재가자로서 불교운동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됐죠.” 남편 윤남진 씨는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속된 말로 입학 커트라인이 높은, 한눈만 팔지 않으면 잘 나갈 수 있는 인기학과 출신이다. 한때 공부 좀 했다고 웃는 윤남진 씨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다 온 이력이 있다. 경찰간부를 꿈꾸는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이나 계기, 이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2학년 때 과대표를 맡았는데, 그때 2학년 과대표는 1학년 때의 성적으로 결정됐어요. 임명 아닌 임명이죠. 그런데 그 첫 번째 임무가 아주 고약했어요. 신입생 기합 주고 몽둥이찜질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죠.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야 할 사람이 몽둥이라니 말이 안 되죠.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회의에 부쳐서 기합의 강도를 반으로 줄이고 저는 선배에게 한 대 맞는 것으로 타협을 봤습니다. 이때 의식이라면 의식이랄까 하는 것이 생긴 것 같아요. 법정대 학생회 일을 보게 되고, 모의 대통령 선거를 기획하기도 하고, 이렇게 이렇게 한발 한발 가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저만치 가 있었어요. 감옥까지 말이죠.” 민주화 운동을 했으니 운동을 계속하더라도 일반 사회운동 쪽에서 했다면 이해가 되고, 또 그렇게 했다면 출세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불교학과 출신도 아니고 평소 불교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참 이상한 일이다. “목포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면회를 왔어요. 여기 이 사람, 제 아내예요. 이 사람 집이 무안인데 학교 선배가 집에서 가까우니 한번 들려보라고 해서 왔데요. 참 황당한 일이죠. 고맙기도 하고. 그 후로 불교책을 보내주곤 했어요. 편지도 보내고……. 그 인연으로 출소하고 나서도 만났죠.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할까 고민 중인데 함께 불교운동을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이 길로 들어선 거죠.” 선배가 들려보라고 했다고 생면부지의 사람을, 그것도 발도 들여놓고 싶지 않을 교도소로 찾아가 면회하는 사람, 불교운동 하자고 한다고 그 길을 따라나선 이 대책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도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참 어려웠어요. 좋아서 한 일이니까 견뎠죠. 정말 힘들었을 때는 신혼 초 전국불교운동연합에서 일할 때,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지고 개혁종단이 들어서면서 함께 일했던 스님들은 요직으로도 들어가고 사정이 많이 나아졌는데 재가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명절인데 떡값도 없고, 보다 못해 제가 아는 스님을 찾아가 손을 벌렸어요. 백만원을 얻어서 간신히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 차비 챙겨 주었습니다. ‘고난은 같이해도 영광을 함께 누리기 힘들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더군요. 원망은 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말았어요. 하지만 정말 씁쓸하기는 했습니다. 그 후 3년간 조계종 중앙종무기관에서 일할 때 사정이 조금 풀렸죠.” 종무기관에서 계속 일했으면 서정이 좀 더 나았을 텐데 천성이 한곳에 있지 못하는 건지 재가연대로 자리를 옮긴다. “기본적으로 종무기관에서 할 일은 다했다고 봤어요. 무엇보다 94년, 98년 두 번의 종단 사태를 보면서 이래서는 한국불교에 희망이 없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제 주제에 오만한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런 생각에 재가연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창립 당시 스님 없는 재가단체는 3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들 했는데 벌써 11년을 맞고 있어요. 재가연대에서도 힘든 일 많았지만 보람도 있었어요. 그 중 하나가 장충동 소재 6층짜리 건물을 구입한 거죠. 총 34억 원이 소요되었는데 ‘(사)우리는 선우’와 재가연대가 반씩 내기로 했어요. 당시 재가연대 전 재산은 전세보증금 8천만 원이었어요. 사무처장으로서 운영위원회에 보고를 했습니다. 지금 월세에 조금 더 보태면 은행이자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일단 저지르고 기금을 모으자고 설득했죠. 지금 생각해도 무지막지하게 무모한데도 승인을 해주셨어요. 그 후로 몸으로 때웠습니다. 사무실 철거, 개조, 배선공사 이런 거 전부 직접 했어요. 지금은 빚도 많이 갚고 시가도 50~60억 정도 나간다고 합니다. 밑지는 장사는 아닌 셈이죠.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일을 할 때 종교 차별을 금지하는 조문을 넣어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하는 데 일조한 것도 큰 보람이죠.” 일련의 이런 활동으로 불교집안에서 밥 먹고 산 은혜는 거의 갚았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일을 모색하던 중 2007년에 제정된 ‘사회적 기업 육성법’을 접한다. “사회적 기업은 고령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우선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여 이들이 자립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기업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구현하는 데 유용하다고 봅니다. 제가 민주화 운동이나 불교운동을 한 것도 함께 잘 살자,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아름답고,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령화하는 우리 불교계의 연령 분포를 보더라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잘만 하면 우리 불교계에 근원적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1기 사회적 기업가 과정을 듣고 경영 공부를 하는 등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위암에 걸렸어요. 수술 이틀 전까지 병원 로비에서 500원짜리 동전 넣어가며 인터넷 강의를 마쳤습니다.” 큰 수술을 받은 지 이제 겨우 1년 반, 아직은 요양에 신경을 써야 할 텐데 다시 그 일을 시작했다니 무모해도 정도가 있지 보통 무모한 것이 아니다. “1년 반 정도 책 읽는 일로 소일하며 지냈는데 마냥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요. 몸도 많이 좋아졌고, 섭생에 주의하고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생산성본부에서 다시 경영 공부를 하고, ‘참여불교 재가연대 에너지 사회적 기업 설립 사업단’으로 ‘예비 사회적 기업 지원사업 공모’에 1차 서류심사 통과했습니다. 요즘 (예비)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원이 많으니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익잉여금을 주주에게 배당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일반 영리기업과 달리 아까 말한 대로 재투자와 고령자 등을 우선 배려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사회적 기업도 엄연히 기업입니다. 이익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3년 정도 지원이 끊긴 후에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가, 그런 경영계획을 갖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원금만 날리고 마는, 결과적으로 사회에 피해만 입히는 꼴이 됩니다. “기업가란 변화를 찾고, 변화에 대응하고, 변화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다.”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늘 가슴에 새긴다는 윤남진 씨, 그는 “모든 진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뺨에 자신의 뺨이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며 성공한 곳은 떠나고 미완의 곳으로 간다는 체 게바라와 많이 닮았다. 사업적 기업이 창립되면 나도 취직시켜 달라고 청탁 아닌 청탁을 하고 한바탕 크게 웃고 헤어졌다. |